황순원 시인 / 떨어지는 이날의 태양(太陽)은
하늘의 왕자(王子), 밝음의 사자(使者), 휘황(輝煌)한 화염(火炎)을 내려 쏘든 태양(太陽)이 꺼구러졌다, 서산(西山)에 피를 토(吐)하고.
태양(太陽)아, 만민(萬民)이 총대를 겨누고 있든 불덩아 그렇게 너의 영화(榮華)가 오랫동안 계속할 줄 알었드냐? 그런 폭행(暴行)이 앞으로 더 있을 줄 알었드냐? 네가 죽은 후에 너를 위하여 울 자(者)는 눈우에 우짓는 가마귀떼 뿐이다.
가난한 우리, 흑막(黑幕)속에 허덕이는 우리에게는 너의 홍소(洪笑)의 한끝을 넌즈시 보내고, 화려(華麗)한 양옥(洋屋) 카텐에서만 아양을 부렷지? 도로혀 음영(陰影)을 찾아 X행(行)을 하려는 그들에게 갑있는 너의 힘을 헛되이빌려 주었지?
그렇다, 우리는 태양(太陽)에게 반항(反抗)한다. 우리를 버린 너와의 인연을 끊으련다. 지금 회색(灰色) 구름을 넘어 떨어지는 이 날의 태양(太陽)은 우리의 총알에 맞아 마지막 호흡(呼吸)을 고하는 것이 아니냐, 저 흙속에 묻힌 날쎈 봉화(烽火)에 쫓기는 것이 아니냐?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미래(未來)에 사는 사나이 부제 : 그는 과거(過去)를 묻어버린 사나이―.
생각하면 가지가지의 애달픈 추억(追憶)― 아내를 찾아 저 암흑(暗黑)의 거리 거리를 싸돌았고, 자식을 안고 눈비 속에 밤을 새웠다. 그리고 고양이의 눈에 불켜는 봄밤에 험한 산(山)을 넘어도 보았고, 마가을 살얼음진 한길의 강물을 헤처 건너기도 했다. 생각하면 가슴 답답한 추억(追憶)의 더듬길.
그는 이미 고향(故鄕)의 맑은 하날을 잃었고, 그렇게도 사랑하든 들과 강물도 빼앗겼으며 끝으로 아내의 살뜰한 정(情)마저 버리게 되었다. 제단(祭壇)에 피흘린 양(羊)같이 참된 정성이 그보다도 어리석게 착한 빈 마음이 장마물에 쓸리듯이 앗기었나니, 아끼었나니.
거의 영겁(永劫)에 달린 비애(悲哀). 뜬뜬히 머듬든 마음의 상처(傷處),― 흰 장미(薔薇) 들고 옛연인(戀人)의 무덤을 찾는 소복한 처녀(處女)에게 지지 않게 안타까이 주먹으로 가슴 밑바닥을 치며 통곡하였고,
달겨드는 맷도야지의 만용(蠻勇)보다도 더 되세게 세차히 모든 오뇌(懊惱)와 저항(抵抗)하여 보았으나, 그러나, 보래빛 같이 함박한 추억(追憶)의 실마리는 풀리었나니, 그를 괴롭혔나니 차라리 과거(過去)의 기록(記錄)을 재로 불사뤄 버림만 같지 못했다.
과거(過去)를 장사지낸 사나이, 미래(未來)에 사는 사나이 이젤랑 야스꺼운 미련(未練)에 얽매우지 마라. 희망(希望)의 서광(曙光)이 빛나는 감벽(紺碧)의 바다에 떠서 미래(未來)를 위하여 꾸준히 노질을 하렴으나, 우렁찬 개가(凱歌)를 불러 불러 웅장(雄壯)한 미래(未來)를 바라고 무보(武步)를 옮기려므나.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사막(砂漠)을 횡단(橫斷)하는 사나이
피로(疲勞)에 핏대줄 서리운 다리를 한 개의 지팽이에 맡기어 무한(無限) 광대(廣大)한 사막(砂漠), 파상형(波狀形)의 사구(砂丘)을 넘는 사람, 흐린 얼굴로 지평선(地平線) 우에 기운 햇볕을 안았나니 모랫바다 속에 묻어 둔 동반자(同伴者), 안해를 생각함인가, 자기의 생령을 위하여 사로 죽인 악대의 시체(屍體)를 그려 봄인가…… 머지않아 이곳에도 저녁의 싸늘한 침묵(沈黙)을 헤치고 두려운 암야(暗夜)가 깃들리겠구나.
그는 왼종일 녹지(綠地)를 찾아 따가운 사원(砂原)을 걸었고, 다시 오는 날의 고로(苦勞)를 가슴 쓰리게 새기고 있다. 하니깐, 선풍(旋風)과 기갈(饑渴), 그리고 맹수(猛獸)가 노리고 있는 속에 섰으니깐 기름진 악대를 타고 별빛의 인도를 받아 잠든 사막(砂漠)을 지나는 저 거룩한 `동방박사(東方博士)'의 성서(聖書)ㄹ랑 생각이나 할까, 서(西)쪽 벌끝 산(山)머리에 목을 바치고 있는 해를 애껴 풀뜯는 양(羊)떼 새에 끼워 풀피리를 불고 있는 목동(牧童)의 꿈일랑 렴이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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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砂漠)을 횡단(橫斷)하는 사나이, 힘찬 젊은아, 하나뿐인 동생의 무덤을 찾아 목비(木碑)를 바라보는 듯한 외로움을, 천가만가 물결이 늘어선 바다에 홀배 띄운 듯한 매서운 심사를 떠날 때의 광영(光榮) 스러웠든 순간(瞬間)과 비겨보고 울지마라. 이제 바라든 최후(最後)의 승리(勝利)를 잡게 되리니, 몇 갑절의 희열(喜悅)을 맛보게 되리니 머나먼 노정(路程)에 녹은 다리나마 앞으로 옮기라. (그대의 뼈는 아직 굳어 있지 않은가, 그대의 마음은 능히 지금의 괴로움을 이길만 하지 않은가.)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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