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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장환 시인 / 화원(花園)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3.

오장환 시인 / 화원(花園)

 

 

꽃밭은 번창하였다. 날로 날로 거미집들은 술막처럼 번지었다. 꽃밭을 허황하게 만드는 문명. 거미줄을 새어 나가는 향그러운 바람결. 바람결은 머리카락처럼 간지러워…… 부끄럼을 갓 배운 시악시는 젖통이가 능금처럼 익는다. 줄기째 긁어먹는 뭉툭한 버러지. 유행치마 가음처럼 어른거리는 나비 나래. 가벼이 꽃포기 속에 묻히는 참벌이. 참벌이들. 닝닝거리는 울음. 꽃밭에서는 끊일 사이 없는 교통 사고가 생기어났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 / 황무지

 

 

1

 

황무지에는 거칠은 풀잎이 함부로 엉클어졌다.

번지면 손가락도 베인다는 풀,

그러나 이 땅에도

한때는 썩은 과일을 찾는 개미떼같이

촌민과 노라리꾼이 북적거렸다.

끊어진 산허리에,

금돌이 나고

끝없는 노름에 밤 별이 해이고

논우멕이 도야지 수없는 도야지

인간들은 인간들은 웃었다 함부로

웃었다!

  웃었다

웃는 것은 우는 것이다

사람쳐놓고 원통치 않은 놈이 어―디 있느냐!

폐광이다

황무지 우거진 풀이여!

문명이 기후조(氣候鳥)와 같이 이곳을 들러 간 다음

너는 다시 원시의 면모를 돌이키었고

엉클은 풀 우거진 속에 이름조차 감추어 가며……

벌레 먹은 낙엽같이 동구(洞口)에서 멀리하였다.

 

2

 

저렇게 싸늘한 달이 지구에 매어달려

몇 바퀴를 몇 바퀴를 몇 바퀴…… 를 한없이 돌아나는 동안

세월이여!

너는 우리게서 원시의 꿈도 걷어 들였다

죽어진 나의 동무는 어디 있느냐!

매운 채찍은 공간에 울고

슬픔을 가리운 포장 밖으로 시꺼멓게 번지는 도화역(道化役)의 커단 그림자

유리 안경알에 밤안개는 저윽이 서리고

항상

꿈이면 보여 주던 동무의 나라도

이제 오래인 세월에 퇴색하여

나는 꿈 속 어느 구석에서도 선명한 색채를 보지는 못하였다

우거진 문명이여?

엉클은

  풀

너는 우리게 무엇을 알려주었나

 

3

 

광부의 피와 살점이 말라붙은 헐은 도로꼬

폐역(廢驛)에는 달이 떴다

텅―비인 교회당 다 삭은 생철 지붕에

십자가 그림자

  로

누이고

양(洋) 당인(唐人). 광산가의 아버지, 성당의 목사도

기업과

술집과 여막(旅幕)을 따라 떠돌아 가고

궤도의 무수한 침목(沈木)

끝없는 레일이 끝없이 흐르고 휘이고

썩은 버섯 질긴 비듬풀!

녹슨 궤도에 엉클어졌다

해설피 장마철엔

번갯불이

  쏘ㅏㅇ

쏘ㅏㅇ―하늘과 구름을 갈라

다이나마이트 폭발에

산맥도 광부도 경기(景氣)도 웃음도 깨어진 다음

비인 대합실 문 앞에는 석탄 쪼가리

싸늘한 달밤에

잉, 잉,

잉, 돌덩이가 울고

무인경(無人境)에

달빛 가득 실은 헐은 도로꼬가 스스로이 구른다

부엉아! 너의 우는 곳은 어느 곳이냐

어지러운 회오리바람을 따라

불길한 뭇 새들아 너희들의 날개가 어둠을 뿌리고 가는 곳은 어느 곳이냐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 / 황혼

 

 

직업소개에는 실업자들이 일터와 같이 출근하였다. 아무 일도 안하면 일할 때보다는 야위어진다. 검푸른 황혼은 언덕 아래로 깔리어 오고 가로수와 절망과 같은 나의 기―ㄴ 그림자는 군집(群集)의 대하(大河)에 짓밟히었다.

 

바보와 같이 거물어지는 하늘을 보며 나는 나의 키보다 얕은 가로수에 기대어 섰다. 병든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근육이 풀릴 때 향수는 실마리처럼 풀려 나온다. 나는 젊음의 자랑과 희망을, 나의 무거운 절망의 그림자와 함께, 뭇 사람의 웃음과 발길에 채이고 밟히며 스미어 오는 황혼에 맡겨 버린다.

 

제 집을 향하는 많은 군중들은 시끄러이 떠들며, 부산―히 어둠 속으로 흩어져 버리고. 나는 공복의 가는 눈을 떠 희미한 노등(路燈)을 본다. 띄엄띄엄 서 있는 포도 위에 잎새 없는 가로수도 나와 같이 공허하고나.

 

고향이여! 황혼의 저자에서 나는 아리따운 너의 기억을 찾아 나의 마음을 전서구(傳書鳩)와 같이 날려 보낸다. 정든 고샅. 썩은 울타리. 늙은 아베의 하―얀 상투에는 몇 나절의 때묻은 회상이 맺혀 있는가. 우거진 송림 속으로 곱게 보이는 고향이여! 병든 학이었다. 너는 날마다 야위어 가는……

 

어디를 가도 사람보다 일 잘하는 기계는 나날이 늘어나 가고, 나는 병든 사나이. 야윈 손을 들어 오랫동안 타태(隋怠)와, 무기력을 극진히 어루만졌다. 어두워지는 황혼 속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보이지 않는 황혼 속에서, 나는 힘없는 분노와 절망을 묻어 버린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吳章煥, 1918.5.5 ~ 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중퇴.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朝鮮文學(조선문학) ≫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咸亨洙) 등과 〈詩人部落(시인부락)〉 동인으로 본격적인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성벽 城壁』(1937)·『헌사 獻辭』(1939)·『병(病)든 서울』(1946)·『나 사는 곳』(1947) 등과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詩集)』(動向社, 1946)이 있음. 월북 이후 시집 『붉은 깃발』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