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초 시인 / 풍우(風雨)
봄도 반 넘어 깊은 산방에 내 홀로 잠을 깨어 누웠나니
베개 위에 듣는 비바람 소리는 뒤안 꽃숲을 다 흔들어 놓는다.
꽃이 피면 왜 이리 비바람은 많은가
세월이 하마 덧없어 뒤흔들며 가느니.
바라춤, 통문관, 1959
신석초 시인 / 함령지곡(咸寧之曲)
홍포(紅袍) 금사(金絲)띠 흑사모(黑紗帽)로 피리 가야금 적대 비껴 들고 무고(舞鼓) 앞에 앉다 적적한 고궁 뜰에 강화 화문석이 차구나 조용히 울려 퍼지는 함녕지곡 옛 가락은 구름인 양.
그날 번화했던 뜨락에 빈 자락 깔린 위에 새삼 그윽히 우조(羽調)가 흐른다.
처용은 말한다, 조광출판사, 1974
신석초 시인 / 호접(蝴蝶)
호접(蝴蝶)이여! 언제나 네가 꽃을 탐내어 붉어 탈 듯한 꽃동산을 헤매느니
주검도 잊고 향내에 독주에 취하여 꽃잎 위에 네 넋의 정열이 끝나려 함이
붉으나 쉬이 시들어질 꽃잎의 헛됨을 네가 안다 하여도
꿈결 같은 즐거움 사라질 이슬 위에 취함은, 네 삶의 광휘일러라.
자오선, 1937
신석초 시인 / 화장(化粧)
다만 불멸의 소리 있을 뿐. ―발레리
날마다, 날마다 고적한 거울을 대하여 내 모양을 꾸미는 내 심사를, 그대는 알아요?
내가, 내 꾸밈으로써 구태여 그대의 욕구를 끄을려 함은 아니언만
그래도, 난 내 모양 꾸미는 그 일에만 팔려, 날마다 거울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바라춤, 통문관, 1959
신석초 시인 / 흐려진 달
하룻밤, 내가 달을 좇아서 이름도 모를 먼 바닷가 모래 위에다 장미꽃으로 비밀의 성을 쌓고 있더니
밤이 깊도록 내가 모래성에서 다디 단 술에 취하여 있을 때, 문득 구름이 몰려와서 내 달을 흐레다.
아아, 내 꿈이 덧없음이런가 바다의 신이 나를 시기하였음이런가 심연으로 달은 빠지다.
달이여, 너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헤매다, 나는 보다 물결쳐 움직이는 바다의 그 큰 모양을…….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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