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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신석초 시인 / 풍우(風雨)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5.

신석초 시인 / 풍우(風雨)

 

 

봄도 반 넘어

깊은 산방에

내 홀로 잠을

깨어 누웠나니

 

베개 위에 듣는

비바람 소리는

뒤안 꽃숲을

다 흔들어 놓는다.

 

꽃이 피면 왜 이리

비바람은 많은가

 

세월이 하마 덧없어

뒤흔들며 가느니.

 

바라춤, 통문관, 1959

 

 


 

 

신석초 시인 / 함령지곡(咸寧之曲)

 

 

홍포(紅袍) 금사(金絲)띠

흑사모(黑紗帽)로

피리 가야금 적대 비껴 들고

무고(舞鼓) 앞에 앉다

적적한 고궁 뜰에

강화 화문석이 차구나

조용히 울려 퍼지는

함녕지곡

옛 가락은 구름인 양.

 

그날 번화했던 뜨락에

빈 자락 깔린 위에

새삼 그윽히 우조(羽調)가 흐른다.

 

처용은 말한다, 조광출판사, 1974

 

 


 

 

신석초 시인 / 호접(蝴蝶)

 

 

호접(蝴蝶)이여! 언제나

네가 꽃을 탐내어

붉어 탈 듯한

꽃동산을 헤매느니

 

주검도 잊고

향내에 독주에 취하여

꽃잎 위에 네 넋의

정열이 끝나려 함이

 

붉으나 쉬이

시들어질 꽃잎의 헛됨을

네가 안다 하여도

 

꿈결 같은 즐거움

사라질 이슬 위에

취함은, 네 삶의 광휘일러라.

 

자오선, 1937

 

 


 

 

신석초 시인 / 화장(化粧)

 

 

다만 불멸의 소리 있을 뿐. ―발레리

 

날마다, 날마다

고적한 거울을 대하여

내 모양을 꾸미는

내 심사를, 그대는 알아요?

 

내가, 내 꾸밈으로써

구태여 그대의 욕구를

끄을려 함은 아니언만

 

그래도, 난 내 모양 꾸미는

그 일에만 팔려, 날마다

거울을 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바라춤, 통문관, 1959

 

 


 

 

신석초 시인 / 흐려진 달

 

 

하룻밤, 내가 달을 좇아서

이름도 모를 먼 바닷가

모래 위에다 장미꽃으로

비밀의 성을 쌓고 있더니

 

밤이 깊도록 내가 모래성에서

다디 단 술에 취하여 있을 때,

문득 구름이 몰려와서

내 달을 흐레다.

 

아아, 내 꿈이 덧없음이런가

바다의 신이 나를 시기하였음이런가

심연으로 달은 빠지다.

 

달이여, 너는 어디로 갔는가

나는 헤매다, 나는 보다

물결쳐 움직이는 바다의 그 큰

모양을…….

 

석초시집, 을유문화사, 1946

 


 

신석초(申石艸) 시인 / 1909~1975

충남 서천 출생. 본명은 응식(應植). 경성제일보를 거쳐 일본 호오세이(法政)대학 철학과 수학. 신유인(申維仁)이라는 필명으로 카프 진영의 비평가로 활동하다 전향함. 1935년 자신이 편집에 관여했던 잡지 <신조선>에 [비취단장(翡翠斷章]을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시작함. 고전적 혹은 전통적인 소재를 주로 다룸. 시집으로 <석초시집>(1946), <바라춤>(1956), <폭풍의 노래>(1974), <수유동운(水踰洞韻)>(197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