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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이호우 시인 / 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2. 27.

이호우 시인 / 비

 

 

파초 숨가쁜 잎에

뚝뚝 비 듣는 소리

 

간절한 은혜를 다투어

순(筍)들이 일어나고

 

년사(年事)를 근심턴 늙은이

창(窓)을 열고 듣는다

 

이호우시조집, 영웅출판사, 1955

 

 


 

 

이호우 시인 / 비원(悲願)

 

 

저녁 노을 속에

첨탑(尖塔) 끝 치솟은 십자(十字)

 

천심(天心)은 겨눌수록

너무나 허공(虛空)인가

 

비원(悲願)은 절규(絶叫)를 견디어

기(旗)빨보다 아파라.

 

휴화산, 중앙출판사, 1968

 

 


 

 

이호우 시인 / 산 샘

 

 

가을 산(山)빛이

고이도 잠긴 산 샘

 

나무잎 잔을 지어

한 모금 마시고는

 

무언가 범(犯)한 듯하여

다시 하지 못하다.

 

이호우시조집, 영웅출판사, 1955

 

 


 

 

이호우 시인 / 술

 

 

임이 달리하곤 나를 미쳤다니

외로 남은 몸이 잠자코 더불은 술

이제는 임 도루 불러도 내 못 갈까 하도다.

 

광자(狂者)는 천지총아야(天之寵兒也) 아암 천지총아(天之寵兒)지

하늘과 땅이 마구 물결을 치는구나

내 언제 풍선(風船)이 됐길래 둥 둥 이렇게 좋냐.

 

젊은 외롬에 겨워 석가(釋迦)는 산(山)으로 가고

붉은 목숨의 호사로 기독(基督)은 십자가(十字架)를 지고

인생(人生)은 그렇게도 청춘(靑春)이 누려보고 싶은 건가.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는 그저 납빛 안개

광음(光陰)도 범(犯)하지 못하는 무중력층(無重力層)에 나는 있다

진실로 이 꿈 아닌 꿈아 다 하도록 깨지 말라.

 

이호우시조집, 영웅출판사, 1955

 

 


 

 

이호우 시인 / 오월(五月)

 

 

5월(月) 아침비에 부풀은 산(山)과 들을

넉넉한 세월처럼 부드러운 낙동강(洛東江)

사람도 배도 물새도 숨을 함께 했도다.

 

한철 풍경(風景)이긴 너무나 간절한 정(情)

부듯이 가슴이 메이며 핏줄이 더워진다

내 어이 어디로 가지랴 아아 나의 조국(祖國).

 

눈을 감아 본다 아득히 그 새벽을

새로운 하늘을 찾아 푸른 목숨들이

이 터에 자리를 잡고 복을 빌던 그 모습.

 

얼마나 어여쁜가 이 날을 사는 몸이

무한한 이 은혜 속에 자손(子孫)들을 심으면서

우리 턱 기대어 살자꾸나 사랑하는 사람아.

 

이호우시조집, 영웅출판사, 1955

 

 


 

이호우 시인

시조시인. 아호는 이호우(爾豪愚). 경상북도 청도(淸道) 출생. 1924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28년 신경쇠약증세로 낙향하였고, 29년에 일본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에 유학하였으나 신경쇠약증세의 재발과 위장병으로 귀국하였다. 시작활동은 39년 동아일보 <투고란>에 <낙엽>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고, 40년 《문장》에 이병기(李秉岐)의 추천으로 <달밤>이 실리면서 본격화되었다. 광복 후 대구일보 편집과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55년 첫시조집 《이호우시조집》을 간행하였고, 그 후의 작품들을 모아 68년 《휴화산(休火山)》을

발간하였다. <달밤>에서와 같이 범상한 제재를 선택하여 평이하게 쓴 것이 초기 작품의 특징이라면 《휴화산》에서는 인간 욕망의 승화와 안주적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55년 첫시조집으로 제 1 회 경북문화상을 받았고 72년 대구(大邱) 남산공원에 시비가 세워졌다. 55년 첫시조집으로 제 1 회 경복문화상을 받았고, 편저로 《고금시조정해(古今時調精解)》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