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택 시인 / 산울림
아부지, 왜 이리 무덤까지가 멀다요. 오늘도 나는 아버지 무덤에 닿지 못하고 해 진 풀잎들과 나무들 사이를 헤매며 길 찾지 못합니다. 아부지, 죽음에서 삶까지 길이 왜 이리 멀다요. 야 이놈아 없는 세상의 길을 찾지 말고 논을 찾아라 논을.
꽃산 가는 길, 창작과비평사, 1988
김용택 시인 / 살가지 잡아먹세
새벽이면 살금살금 저 남산 내려 오며 꽃가지 흔들어 꽃잎 떨구고 동네 오리 닭 잡아 먹던 저 남산 살가지 또 한 마리 잡았네 동네 사람들 모여들어 살가지 가죽 벗겨 살가지 가죽 뽕나무에 널어 걸고 살가지 국 끓여서 너도 한 그릇 나도 한 그릇 한 그릇씩 다 나누어 먹었네.
호랑이 없는 저 남산에 왕노릇 하던 살가지 세 마리 잡아 먹었더니 또 한 마리 나와 왕노릇 하네 잡아 먹세 잡아 먹세 이 뽕나무 저 뽕나무 살가지 가죽 쭉쭉 늘려 장구 북 만들어 메고 북 치고 장구 치며 이산 저산 살가지 몰이 한 마리만 잡아 먹고 이 살가지 키워 주는 저 산 너머 저 살가지 잡아 먹고 저 살가지 키워주는 이 산 너머 이 살가지도 잡아 먹고 살가지란 살가지 노린내 나는 양살가지 다 잡아 먹고 우리 할매 친정길 우리 할매 업어다 준 호랑이, 호랑이 등에 타고 이산 저산 저 남산 진달래꽃 가지 꺾어 들고 이산 저산 한라산 이산 저산 백두산 훌훌훌 건너 뛰세 훌훌훌 건너 뛰세.
그리운 꽃 편지, 풀빛, 1989
김용택 시인 / 새벽
보아라 이 나라 산맥들이 제 아랫도리를 으깨어 부수고 허물어 이루어놓은 저 김나는 새벽 들판을 보아라 보아라 이 나라 농사꾼들이 시퍼렇게 떨리는 낫으로 팍팍한 제 가슴들을 낫질하여 피 뚝뚝 떨어지는 반역의 낫을 들고 웅웅 고막 터지는 피울음을 울며 저 산 너머 저 하늘 끝까지 피를 뿌려 핏빛으로 불타는 아침 노을을 끌고 오는 저 농사꾼들의 더운 새벽을 보아라.
그리운 꽃편지, 풀빛, 1989
김용택 시인 / 섬진강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85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몽구 시인 / 사람을 기다리며 외 2편 (0) | 2020.03.21 |
|---|---|
| 최두석 시인 / 샘터에서 외 1편 (0) | 2020.03.21 |
| 송기원 시인 / 편지 외 2편 (0) | 2020.03.21 |
| 기형도 시인 / 정거장에서의 충고 외 2편 (0) | 2020.03.21 |
| 구상 시인 / 은행(銀杏) 외 2편 (0) | 2020.03.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