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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용택 시인 / 산울림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1.

김용택 시인 / 산울림

 

 

아부지, 왜 이리 무덤까지가 멀다요.

오늘도 나는 아버지 무덤에 닿지 못하고

해 진 풀잎들과 나무들 사이를 헤매며 길 찾지 못합니다.

아부지, 죽음에서 삶까지 길이 왜 이리 멀다요.

야 이놈아

없는 세상의 길을 찾지 말고 논을 찾아라 논을.

 

꽃산 가는 길, 창작과비평사, 1988

 

 


 

 

김용택 시인 / 살가지 잡아먹세

 

 

새벽이면

살금살금

저 남산 내려 오며

꽃가지 흔들어

꽃잎 떨구고

동네 오리 닭 잡아 먹던

저 남산 살가지

또 한 마리 잡았네

동네 사람들 모여들어

살가지 가죽 벗겨

살가지 가죽

뽕나무에 널어 걸고

살가지 국 끓여서

너도 한 그릇

나도 한 그릇

한 그릇씩 다 나누어 먹었네.

 

호랑이 없는 저 남산에

왕노릇 하던 살가지

세 마리 잡아 먹었더니

또 한 마리 나와 왕노릇 하네

잡아 먹세 잡아 먹세

이 뽕나무 저 뽕나무

살가지 가죽 쭉쭉 늘려

장구 북 만들어 메고

북 치고 장구 치며

이산 저산 살가지 몰이

한 마리만 잡아 먹고

이 살가지 키워 주는

저 산 너머 저 살가지 잡아 먹고

저 살가지 키워주는

이 산 너머

이 살가지도 잡아 먹고

살가지란 살가지

노린내 나는 양살가지

다 잡아 먹고

우리 할매 친정길

우리 할매 업어다 준

호랑이, 호랑이 등에 타고

이산 저산 저 남산

진달래꽃 가지 꺾어 들고

이산 저산 한라산

이산 저산 백두산

훌훌훌 건너 뛰세

훌훌훌 건너 뛰세.

 

그리운 꽃 편지, 풀빛, 1989

 

 


 

 

김용택 시인 / 새벽

 

 

보아라

이 나라 산맥들이

제 아랫도리를

으깨어 부수고 허물어

이루어놓은

저 김나는 새벽 들판을 보아라

보아라

이 나라 농사꾼들이

시퍼렇게 떨리는 낫으로

팍팍한 제 가슴들을 낫질하여

피 뚝뚝 떨어지는

반역의 낫을 들고

웅웅 고막 터지는

피울음을 울며

저 산 너머

저 하늘 끝까지

피를 뿌려

핏빛으로 불타는

아침 노을을 끌고 오는

저 농사꾼들의

더운 새벽을 보아라.

 

그리운 꽃편지, 풀빛, 1989

 

 


 

 

김용택 시인 / 섬진강  1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섬진강, 창작과비평사, 1985

 

 


 

김용택(金龍澤, 1948 ~ ) 시인.

전북 임실 출생.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 1982년 “21인 신작 시집”에 ‘섬진강’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섬세한 시어와 서정적인 가락을 바탕으로 농촌의 현실을 노래하였다. 섬진강 곁에 거처를 두고 초등 학교 교사로 재직중인 그는 이제까지 시집 『섬진강』(1985) · 『맑은 날』(1986) · 『누이야 날이 저문다』(1988) · 『꽃산 가는 길』(1988) · 『그리운 꽃편지』(1989) · 『그대, 거침없는 사랑』(1993) · 『강 같은 세월』(1995) · 『그 여자네 집』(1998) 등을 펴낸 바 있다. 김용택은 1986년에 ‘김수영 문학상’, 1997년에 ‘소월 시문학상’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