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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원 시인 / 편지
어머니.
긴 밤이 끝나고 새벽이 오려 하고 있습니다. 쇠창살 너머로 새벽 별이 스러지고 이제 막 동이 트는 능선마다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세요. 내일을 살기 위하여 오늘을 죽는 새벽의 사람들을 보세요. 이슬에 젖은 발자욱 소리가 지금 산야를 울립니다.
어머니.
이름 없는 산야의 이름 없는 무덤들 사이에서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시들은 잡초들 무성한 무덤 너머로 새벽 별이 스러지고 이제 막 동이 트는 능선마다 달려오는 눈부신 새벽의 사람들을 위하여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그토록 긴 밤을 떠돌던 많은 넋들과 함께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
송기원 시인 / 한잔 술에
열 아홉 꿈꾸는 나이로, 보리밭 이랑에 앉아 나물을 캐었어요. 보리밭이나 나물만 어디 푸르렀나요. 가난하지만 때묻지 않은 내 웃음도 푸르게 눈부셨어요. 아직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젖가슴은 이랑, 이랑을 메울 듯이 터지게 부풀었구요.
당신처럼 마음이 허해서 떠도는 이를 보면 한잔 술에 스무 해 전 내 열 아홉을 담아주고 싶어요. 갈색으로 시들은 웃음 저 너머 차갑게 식어 버린 젖가슴 저 깊이 그때의 보리밭 이랑에서, 처음 가슴을 열어 당신처럼 허한 마음을 채우고 싶어요.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송기원 시인 / 허방
마음 속 맺힌 매듭 풀지 못해서 밤마다 헤매지만 돌아갈 곳 없어서 헤어진 사람들은 별빛보다 아득해서 싸구려 막소주라도 취할 수 없어서 거리의 불빛들이 원수보다 깊어서
내딛는 걸음마다 끝내 허방을 짚거든 짓뭉개듯, 짓뭉개듯, 나라도 기억해요. 역전 뒤 히빠리 골목에 누워, 스무 해 동안 아직 기다리고 있는 나라도 기억해요.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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