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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송기원 시인 / 편지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1.

송기원 시인 / 편지

 

 

어머니.

 

긴 밤이 끝나고 새벽이 오려 하고 있습니다. 쇠창살 너머로 새벽 별이 스러지고 이제 막 동이 트는 능선마다 달려오는 사람들을 보세요. 내일을 살기 위하여 오늘을 죽는 새벽의 사람들을 보세요. 이슬에 젖은 발자욱 소리가 지금 산야를 울립니다.

 

어머니.

 

이름 없는 산야의 이름 없는 무덤들 사이에서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시들은 잡초들 무성한 무덤 너머로 새벽 별이 스러지고 이제 막 동이 트는 능선마다 달려오는 눈부신 새벽의 사람들을 위하여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그토록 긴 밤을 떠돌던 많은 넋들과 함께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

 

 


 

 

송기원 시인 / 한잔 술에

 

 

열 아홉 꿈꾸는 나이로, 보리밭 이랑에 앉아

나물을 캐었어요.

보리밭이나 나물만 어디 푸르렀나요.

가난하지만 때묻지 않은

내 웃음도 푸르게 눈부셨어요.

아직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젖가슴은

이랑, 이랑을 메울 듯이 터지게 부풀었구요.  

 

당신처럼 마음이 허해서 떠도는 이를 보면

한잔 술에 스무 해 전 내 열 아홉을 담아주고 싶어요.

갈색으로 시들은 웃음 저 너머

차갑게 식어 버린 젖가슴 저 깊이

그때의 보리밭 이랑에서, 처음 가슴을 열어

당신처럼 허한 마음을 채우고 싶어요.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송기원 시인 / 허방

 

 

마음 속 맺힌 매듭 풀지 못해서

밤마다 헤매지만 돌아갈 곳 없어서

헤어진 사람들은 별빛보다 아득해서

싸구려 막소주라도 취할 수 없어서

거리의 불빛들이 원수보다 깊어서

 

내딛는 걸음마다 끝내 허방을 짚거든

짓뭉개듯, 짓뭉개듯, 나라도 기억해요.

역전 뒤 히빠리 골목에 누워, 스무 해 동안

아직 기다리고 있는 나라도 기억해요.

 

마음 속 붉은 꽃잎, 창작과비평사, 1990

 

 


 

송기원(宋基元) 시인, 소설가

1947년 전라남도 보성에서 출생. 서라벌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7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회복기의 노래〉와 같은 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경외성서(經外聖書)>가 당선되어 등단. 저서로는 소설집 『월행(月行)』(1979), 『다시 월문리에서』(1984), 『인도로 간 예수』(1995)와 장편소설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1994), 『여자에 관한 명상』(1996), 『청산』(1997), 『안으로의 여행』(1999), 『또 하나의 나』(2000)와 시집으로 『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1983), 『마음속 붉은 꽃잎』(1990) 등이 있음. 1983 제2회 신동엽 문학상. 1993 제24회 동인문학상. 2001 제9회 오영수문학상. 2003 제6회 김동리문학상. 2003 제11회 대산문학상.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