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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 출구를 찾아라
잠들려고 하면 내 몸 속의 계단을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 들린다 불을 끄다 말고 화들짝 놀라는 집들, 흐린 불빛 사이로 보이는 신발들, 눈을 반쯤 감은 대문들 팩맨이 계단을 올라온다 미로 속의 점선을 먹어 치우며 팩맨이 걸어온다 육체로 된 비디오 드롬 속을 올라온다 잠의 수평선이 더욱 아래쪽에 그어진다 수평선 아래로 내 생애의 집들이 수몰된다 음침한 두뇌의 미로 속엔 끝내 나를 모두 먹어 치우고 땅속에서 솟아오를 파리들이 잠기어 있고, 몇 억년을 쉬지 않고 나타나 하늘의 계단을 오르던 태양도 물 속에 잠기어 있다 무법자 팩맨이 잠의 수평선 위로 뛰어 오른다 팩맨이여 출구를 찾아라 찾아내면 이 게임은 끝난다 팩맨이 물 속으로 다시 들어간다 들어가다 말고 방문을 열어제친다 옷을 벗은 어린 내가 오들오들 떤다 기적 소리를 내며 기차가 역으로 들어온다 그곳에 내가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드를 친다 저지선을 뚫고 팩맨이 달려든다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불켠 상자처럼 내 몸의 방들이 환해졌다 어두워졌다 한다 단풍 환한 방이 닫히고 폭설의 방이 열린다 눈물샘이 환해진다 배꼽이 불을 켠다 팩맨의 검은 칼이 가슴에 걸렸는지 내 두 손이 가슴을 싸안고 돌아눕는다 이불이 발치로 떨어지고 잠의 수평선이 내 몸 위로 솟아오른다 VTR처럼 시간이 나를 돌린다 팩맨을 가둔 채 내가 커튼을 젖힌다 불켠 상자 속에 갇힌 내가 아직도 어두운 서울을 내려다본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 한사코 시(詩)가 되지 않는 꽃
너무 차가운 것은 시가 되지 않는다 너무 뜨거운 것은 시가 아니다 끓는 물 속에 두 발 담그고 있을 땐 시가 나오지 않는다 얼음 속에 누워 눈 뻐언히 뜨고 있을 땐 시가 나오지 않는다
그날, 아무도 시를 쓰지 않았다 다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들고, 은밀히 시를 날려 보냈다 ―새 옷을 입었는가? ―아니, 다만 헌 옷을 벗었어 그날, 아무도 시를 쓰지 않고 웨딩드레스를 찢어 붕대를 만들고 밥주발을 들어 각자의 머리를 담을 관을 삼았다 너무 아름다운 것은 시가 아니다 그날, 입을 벌려 세상 처음인 듯 울 때 그것은 시가 아니었다 다만 한 도시 전체의 개화(開花) 지구밭에 떠오른 한사코 시(詩)가 되지 않는 꽃!
어느별의 지옥, 청하, 1988
김혜순 시인 / 해산(解産)
너 태어나던 순간 찬란하던 태양은 중천에서 떨어지고 강물은 태양을 싣고 거슬러 거슬러 가 버렸지만, 갑자기 밤이 와 버렸지만 세상의 무덤이란 무덤은 모두 열려서 찬란히 머리칼 흔들며 넘치도록 나에게 젖을 먹여 주었지. 피와도 같고, 눈물과도 같고, 골수와도 같은 무덤들의 젖맛이었지. 내가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온몸을 휘감던 몇 백년 전의 전율, 무거워만 가던 나의 앞가슴, 즐거이 앞가슴을 풀어헤치던 산맥들.
그러나 너 태어나 탯줄이 끊기고 눈꺼풀이 떨어지고 인큐베이터 속으로 너 떨어질 때 강물은 다시 흘러 내리고, 무덤들 검게 닫히고 우리는 산 아래로 굴러 떨어졌지. 내 두 젖은 말라 비틀어지고 텔레비젼은 왕왕거리고, 창 밖에선 클랙슨 소리 요란했지. 너 배고파 우는 울음 소리와 함께 산맥은 캄캄하게 돌아누웠지.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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