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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부 시인 / 공동산(共同山)
공동산은 오손도손 가깝게 지내는 넋들이 저마다 더운 가슴으로 저를 덮는 산(山).
흰 옷깃 적신 사람들 다 돌아간 뒤에 무덤들끼리 둘러앉아 이 세상 굽어보며 나직나직 이야기하는 산(山).
드디어 와야 할 것을 미리 알고도 억새풀 흔드는 바람에게나 귀띔해줄 뿐 눈 비비며 드러눕는 산.
고요한 산(山), 넉넉한 산(山) 숨을 죽이고 광주를 지켜보는 산(山).
공동산은 달빛에 젖어서 슬픔으로 저를 번뜩이는 산(山).
빈 산 뒤에 두고, 풀빛, 1989
이성부 시인 / 굿을 보면서 1
보는 사람에게는 저를 보여주지 않는다. 문득 고개숙여 눈감고 긴 한숨 토해내고 먼 나라보다 더 멀어버린 우리 말씀 귀기울이면 그대 보인다. 그대 가슴 할딱거림 보인다.
이마에 돋은 땀 손등으로 닦고 아직 틔지 못한 목청 여리게 뽑아내면 그대 큰 눈망울 소년(少年) 소리 황토밭 소리 어디 구천(九泉)에 가 닿았다가 맨발로 달려와서 우리들 마른 사랑에도 입맞추나니.
그리운 사람들 모두 눈을 감고 듣고 싶은 사람들 모두 귀를 막는다. 오 우리들 세상 이 우스개 한판 놀이 줄광대로 쳐다볼 때마다 우리 나라 보물하늘 내려다보면 입벌린 바보땅!
빈 산 뒤에 두고, 풀빛, 1989
이성부 시인 / 그리운 것들은 모두 먼데서
오늘은 기다리는 것들 모두 황사(黃沙)가 되어 우리 야윈 하늘 노랗게 물들이고 더 길어진 내 모가지, 깊이 패인 가슴을 씨름꾼 두 다리로 와서 쓰러뜨리네.
그리운 것들은 바다 건너 모두 먼데서 알몸으로 나부끼다가 다 찢어져 뭉개진 다음에야 쓸모 없는 먼지투성이로 와서 오늘은 나를 재채기 눈물 콧물 나게 하네.
해일(海溢)이 되어 올라오면 아름다울까. 다 부숴놓고 도로 내려가는 것을. 다치지 않은 살결들 깨끗한 손들만이 남아서 다시 일으켜 세우면 아름다울까. 기진맥진 누워버린 얼굴들을.
백제행, 창작과비평사, 1981
이성부 시인 / 깨끗한 나라
내 고향 굴다리 밑 혼자 살던 거지. 햇볕에 나와 이를 잡고 문득 먼 데 산(山) 바라보고 누더기에 손톱 한 번 문지르고 일어서서 육자배기 흥얼흥얼 제 발자국과 함께 놀던 거지. 봄 거지. 몇 년 전 서울에서도 로마에서도 너무 잘 보이던 고향 거지.
바랄 것도 더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은 저녁마다 제 그림자만 데리고 누울 곳으로 돌아간다. 누워서 세우는 나라를 위해 돌아간다.
빈 산 뒤에 두고, 풀빛, 1989
이성부 시인 / 난지도(蘭芝島)
아름다운 자기 이름을 가진 서울 변두리 난지도에 와서 난지도 공기를 만나고 사람 사는 마을을 들여다보면 안다. 난지도에 와서 우리 나라 시월 하늘 눈 비비며 바라보면 안다.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임을 안다. 파리떼에게도 한잔 먹어라 소주잔을 권하고, 썩은 물 웅덩이에도 희망의 손발을 씻어내는 난지도에 와서 보면 우리 나라 시월 하늘 서럽다 못해 왜 불타는 노을로 소리치는가를 안다. 왜 살아서 스스로 부서지고 싶은 것인가를 안다. 쓰레기에 파묻혀 놀던 개구쟁이들이 쓰레기더미 위에 누워 하늘을 우러른다. 제복의 여학생이 수색(水色) 종점에서 내려 십릿길 걸어, 쓰레기산 또 십 리를 넘어 쓰레기 움막으로 기어든다.
밤이 되어 봉화산 의병 닮은 횃불들을 들고 밤하늘 덮는 먼지 속 몰려가는 사람들, 에헤야 디야, 에헤야 디야 쿵작작 쿵작작 여기서도 왼종일 라디오 소리 들리고 향수 뿌린 여인이 있어 악취에 코막힌 사내들의 가슴을 후벼준다. 서울의 거대한 오물 하치장, 개, 돼지, 짐승들도 숨막혀 아우성만 커진 곳. 사람과 쓰레기가 한몸이 되어 파리떼 속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온갖 꽃을 피우고 바람을 부르고 비를 부른다. 난지도에 와서 사람을 만나고 사람의 마을을 들여다보면 안다. 왜 모든 것이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임인가를 비로소 안다.
백제행, 창작과비평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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