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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규 시인 / 가을집
가을엔 아내의 집에 머물기로 합니다 떨어진 입성도 기워입기로 합니다 여뀌꽃처럼 가난한 아내가 데운 뜨거운 목욕물, 거기 잠시 잠깐 나를 허락해두기로 합니다 마른 먼지 냄새가 나는 그런 갈증의 내 말씀의 곳간도 애써 열어두기로 합니다 녹슨 자물쇠, 열고 열다 상한 손가락, 신선한 두어 방울의 피, 피를 흘리기로 합니다 가을 햇살 속 빨간 피, 그것과도 만나기로 합니다 여름 내내 상한 불빛 하나 들고 비에 젖던, 목선(木船) 하나로 비에 젖어 있던 봉두난발의 저녁 나루터, 내가 마시던 뜨거운 술국, 내가 부르던 유행가 한 가락, (아, 나의 떠돌이 나의 사십 년(四十年) 여기 와 잠시 머물다) 두어 줄 써놓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기로 합니다 감춰진 별빛 찾기, 별빛 찾기, 하늘 속으로 하늘 속으로 내가 잠겨들기로 합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정진규 시인 / 가장 맑디맑게 물꼬를 터주던 것은
새뱅이, 모래무지, 미꾸라지, 구구락지, 얼게미, 고무활, 방패연, 잣치기, 말똥이, 옥천이, 기계충, 율무기, 쇠똥벌레, 비단벌레, 물방개, 땅개비, 구렛골, 구수머리, 봉우재, 도구머리, 읍내(邑內), 회다리, 쇠전거리, 사거리, 양조장, 농업학교, 향교, 천주교회, 명륜당, 삼덕포도원, 이발소집 셋째딸 김미자, 사거리 책방 허씨네 딸들, 신생보육원 영숙이, 우편 집배원 최종재, 탁구를 잘 치던 광성이, 공부를 잘 하던 코주부, 칠장사, 청룡사, 팔사당 바우덕이, 시인(詩人) 임홍재(任洪宰), 내 고향의 말씀들
향기다 꽃이다 별빛이다 내 어머니의 자궁(子宮)이다 지금은 또 어떤 말씀들이 생겨나고 있을까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되도록 시치미를 떼기로 한다 이 말씀의 별빛들 별빛들이 흐려질까 때묻을까 두려운 탓이다 가장 캄캄하고 캄캄할 때 어렵게 어렵게 나를 비춰주던 것은 장리(長利)쌀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내어주던 것은 오직 이들이었다 이 말씀의 별빛들뿐이었다 가장 맑디맑게 물꼬를 터주던 것은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정진규 시인 / 가죽가방
가죽가방 하나를 샀다 일제 때 아버지가 미두(米豆)*하러 들고 다니시던 `오리가방' 같은 걸 찾았지만 없었다 그게 가장 튼튼하리라는 것. 이유는 그것뿐이었지만 일제 때라는 것, 미두(米豆)라는 것 그게 걸렸다 (매사에 나는 이렇게 걸린다 도처에 감옥이다) 포기할까 했지만 감옥을 찾아내서 내가 그의 감옥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감옥일 수 있음의 기쁨!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을 다 뒤졌다 비슷한 것 하날 겨우 찾았다 모양은 보지 않았다 튼튼하면 그만이었다 (감옥은 튼튼해야 마땅하다 그래야 내가 더욱 튼튼한 그의 감옥이 될 수 있다 감옥의 감옥이 될 수 있다) 그대 연서(戀書) 한 통도 마침내 거기 가두었다 가죽가방 하나를 샀다 요즈음 나는 매우 유력(有力)하다 그대 앞에서 유력(有力)하다 가죽가방 앞에서 유력(有力)하다 이제 안심이다 순전히 그걸 위해서였다
* 미두(米豆): 일제 때 미곡의 시세 변동을 이용하여 현물 없이 약속으로만 거래하던 일종의 투기 행위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 1990
정진규 시인 / 강설(降雪)
버린 여자(女子)들이 무시로 다시 찾아온다. 젓가락 한 짝이라도 들려줘야 떠난다. 버린 자식들이 떼지어 몰껴온다. 기계충이 돋은 머리로 그대를 규탄한다. 비로소 강자(强者)를 만난다. 소금과 같다. 한밤중엔 버린 만년필이 찾아온다. 그대의 모든 공책에 쓴다. 그대의 전생애(全生涯)를 누설한다. 구멍 뚫린 모자도 온다. 떨어진 구두 한 짝이 그대 연전(年前)의 한 짝이 동대문시장(東大門市場) 고물상(古物商)으로부터 혼자서 달려온다. 대문을 걷어차고 한 번만 더 걷어차고 내 머릿속으로 깊고 깊게 떨어져가는 것이 보인다. 새들은 한 마리도 날지 않는다. 이렇다. 눈 오는 날의 만남이란 실로 어지러운 어지러운 방문일 뿐이다. 현관(玄關)의 등불이 한 번만 더 어렵게 켜지고 있다.
들판의 비인 집이로다, 교학사,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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