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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몽구 시인 / 만주 할아버지
아직도 부족합니까 우리들이여 아직도 우리의 욕된 과거를 벗어 던지기에 부족합니까 1979년 해 설핏한 압제의 최후를 예감하면서 광주시 문흥동 88번지 암벽에서 본 것은 내 민주 정신에 거는 자부심이 아니었다 일시 모든 걸 잃어버린 비애가 아니었다 해 기울고 깡보리밥으로 이른 저녁을 때운 다음 병사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에 맞추어 쏟아져 내리던 고향 생각이 내 전부는 아니었다 매일 운동시간이면 우리와 함께 나와 절름발이 다리일망정 그의 모든 것을 다하여 달리던 칠순의 할아버지 수염이 길어도 깎지 못하고 젊은 교도관들이 반말지꺼리로 부려도 눈 한번 흘기지 않던 만주 할아버지 이빨이 다 삭아 통보리알이 입 밖으로 흘러 내리기 일쑤지만 언젠가는 저 희고 높다란 담 밖으로 꼭 나가리라 다짐하던 독립군 할아버지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 귀국하였지만 어쩌다 길이 달라 30년이 넘게 통한의 벽을 치던 할아버지 아직도 부족합니까 우리들이여 이 비극을 누가 반갑지 않게 선물한 것인지도 모르면서 아직도 분단의 상처들을 더 깊게 하는가 가슴을 얼어붙이며 눈내리는 날일수록 더 활짝 벗어부치고 온몸을 밀어가던 할아버지 초조해 하거나 헛되이 남에게 기대지 않으면서 성한 사람보다 더 빨리 뛰어다니던 독립군 할아버지 그 통한의 겨울 내가 본 것은 남의 모습이 아니었다 만주로 총자루를 쥐러 떠난 뒤로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는 내 할아버지였다 우리의 화신이었다 부끄러움이었다
끝내 물러서지 않고, 전예원, 1988
박몽구 시인 / 뿌리 내리기
쏟아지는 박래품과 바다 건너로 매도되는 선박의 저 넉넉한 밑바닥에 짓눌린 어둡고 괴로운 자들의 가슴을 보면서 우리들의 분노는 생성된다 멈추고 싶은, 더러는 착취의 시대로 돌아가고픈 것들에게 쐐기를 박기 위하여 우리들은 그림자를 돌보지 않은 채 투신한다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며 우리들이 황폐한 땅으로 새 길을 밀고 나갈 때 바리케이드를 세워 막아서는 곳에 우리들의 주먹은 굳게 쥐어진다 가짜 처녀막을 욕망으로 찢어발기고 거짓말을 전수하는 학교를 넘어뜨린다 우리들이 죽고, 살갗이 노란 우리들의 아가들이 또다시 구부정한 허리로 걸어가는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다 압착기에 눌려 작대기에 채여 무자비한 기계 앞에서 부산하게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일어설 수 없는 몸 위에 뿌리를 내린다 보상받을 수 없는 죽음 위에 저 밑바닥까지 손상된 마음과 함께 삽을 꽂는다 뿌리를 내린다 세월의 흘러감으로 덮이지 않는 곳에 만발한다 뿌리를 뻗는다
거기 너 있었는가, 청사, 1984
박몽구 시인 / 사당동 철거지에서
어느 솜씨가 이토록 보기 좋게 가루를 만들어놨을까 저것이 벽이었을까 저것이 반질반질한 요강이었을까 엉덩이 말리기 좋은 아궁이였을까 고루 알아볼 수 없이 부숴진 위에 내 눈은 섣불리 슬픔을 떨구려 했더니 아뿔싸 온통 바스러진 살들 곁에 코스모스 한 송이 나부끼네 가슴 저미는 열애도 기득권을 약속하는 책도 헌신짝같이 던지고 몸 하나 들고 산동네 사람이 된 친구는 코스모스 흐드러진 가슴을 만지며 이곳에는 모자라는 것이 없다고 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사람과 벽돌을 함께 비벼 뭉개다가 선거철이 되자 다 깎고 한쪽만 남은 머리처럼 몇 채만 남겨둔 무허가 블럭집에 사는 친구는 이곳처럼 마음내키는 대로 발 뻗을 곳은 없다고 했다 색이 바랬다고 부자집에서 버린 신발장 하나가 장롱도 되고 찬장도 되고 책상도 되고 한번 고장에 버린 테레비가 멋진 가보가 된다고 한 채가 포크레인 아가리에 먹히면 오도가도 못할 것 같은데 서너 평 집 한 칸에 열 명이 넘게 쪼그려 자면서도 다시 이웃들이 이불자락을 늘여줘 더 따스하게 잔다고 이 산동네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내 친구는 까맣게 그을은 얼굴에 볼우물이 밉지 않게 패였다 끝내 저 한 송이 코스모스의 허리마저 꺾이고 말면 돌가루들을 말끔히 씻어내고 악취도 걷어내고 고급 맨션이 들어설 예정이라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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