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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두석 시인 / 동두천 민들레
어디에 발 뻗고 누우랴. 칼잠 자는 사람들 불편한 잠자리 탓하는 소리 들리는 듯한 동두천 남산모루 공동묘지. 첩첩한 무덤 틈새 비집고 어설프게 자리잡은 작은 무덤, 무덤 위에 피어 있는 민들레 한 송이.
민들레야, 동두천 민들레야. 너에게서 키 작은 양공주의 굴욕과 자존심을 느끼는 것은 다만 신경과민일 뿐이라고 말해다오. 박토에 뿌리내려 밟혀도 짓밟혀도 다시 돋는 끈질긴 생명이라고 계속 우기다가 살랑대는 봄바람에 보란 듯이 꽃씨를 날려 보내렴.
그렇지만 양키의 어지러운 군화발이 반도에서 사라지는 날, 우리가 우리의 살림을 주장하는 그날이 오면 너는 그냥 전설로 남아다오. 이 땅에 태어나 막다른 길로 쫓기고 몰리다가 자살한 양공주, 그녀의 이름이 민들레였다고 속삭이며 담뿍 이슬을 머금고 피어나렴.
물망초꽃밭, 1991
최두석 시인 / 망초꽃밭
고향길 모퉁이 산비알밭 가슴팍 헤치고 부는 바람에 하얗게 흔들리는 꽃무리 고가메댁 호미 들고 어디로 갔나 고가메양반 두엄 지고 어디로 갔나 지금 감자알 굵어지고 초록 완두콩 여물어 갈 무렵 밭둑까지 우거진 망초 꽃무리 벌 나비 불러 흠뻑 흐드러지나니
바람결에 들었던가 고가메양반 서울 가 청소부 되었다는 말 쓰레기 치워 고물 주워 먹고 살 만하다는 구불구불 눌러 쓴 볼펜 글씨 그 누가 편지 한 통 받았다던가 편지 받은 이마저 동네 떠나고
이제는 동네라고도 말할 수 없는 헛헛한 고향, 빈집에 바람보다는 빈 밭에 바람보다는 무수한 꽃망울 무성한 망초꽃 우줄거려 좋아 내 마음 꽃송이 따라 하염없이 흔들리나니 일찍이 망초꽃, 아메리카에서 물 건너 온 사연 잊어도 좋으리 양키의 기병대에 잿더미 된 인디언 마을 옥수수밭 망초꽃밭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잠시 잊어도 좋으리.
물망초꽃밭,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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