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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 시인 / 바람
며칠을 바람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저물 때 저물어서 고개 숙여 어둑어둑 걷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스물은 슬픈 것 같습니다
걸을수록 슬픔은 무거워 몸으로 견디기 힘듭니다
슬픔이 무거워 어둠에 머리 기대고 핀 하얀 들꽃들을 만났습니다
정든 땅 언덕 위 초가 토방에 앉아 해 걷힌 눈을 마당에 깔았습니다
누이야 날이 저문다, 창작과비평사, 1988
김용택 시인 / 보리
비바람 분다 보리야 비바람이 불면 바람 온 쪽 보며 바람 간 쪽으로 쓰러지자 위엔 언제나 하늘이고 등엔 언제나 땅이다 온몸으로 끝까지 쓰러져 무릎에서 뿌리내려 몸 들고 고개 들고 일어서자 서너 번 쓰러지면 서너 번 일어나는 보리야 온몸이 일어나는 보리야 잘 드는 조선낫으로 베어도 피 한 방울 없는 보리야 가자 오뉴월 뙤약볕 아래 보릿대 춤으로 가자
누이야 날이 저문다, 창작과비평사, 1988
김용택 시인 / 사랑과 밥과 시
날이 저문다.
들판 논에서는 풀벌레 한 마리 울지 않는다. 미꾸라지 개구리 우렁 여치 메뚜기 소금쟁이 물방개들 몰살되어 둥둥 물꼬에 밀려 떴다. 벼알은 땅에 떨구려는 아버지의 메마른 눈물 같다. 달이 뜨면 달빛에 더 그렇고 농사가 잘되면 더 그렇다. 달도 달빛도 이제 썰렁하다. 들판은 달빛으로 더욱 적막하고 들 가까운 작은 산에서 풀꽃들이 하얗고, 풀벌레들이 논을 향해 겁나게 울어댄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인가보다 논은.
반딧불들이 이따금 논 높이 날은다.
아아, 으으 으실으실 춥고 골통이 지끈지끈 패고 쪼개질 것 같다. 살균제에다 살충제를 섞어 강력한 농약을 살포한 날 창호지문에 비치는 달빛을 보며 누워 있는 내 몸은 불덩어리 같고 둥둥 뜬다. 방구석마다 거대한 빌딩들이 솟았다가 허물어지고 야구장 축구장의 기만 명 사람들의 주먹과 함성이, 가투하는 학생들을 막는 전투경찰들의 방망이와 최루탄 연기과 함께 온갖 형용으로 살아나 내 몸을 두들기고 짓눌러 나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헛소리를 하지만 내 몸 또한 온갖 병균을 가득 키우며 보다 강력한 농약을 기다린다. 줄줄 쏟는 설사와 억억 토하는 쓰디쓴 토사물들이 푸르스름하게 보이고 똥줄이 끊어질 것 같은 통증으로 고개들어 앞산을 보면 앞산 또한 내 나라를 지킨다는 머리 기른 군인들이 정치하는 강력한 새 시대 한국적 특수 민주주의만큼이나 살벌하고 적막하다.
억억억 토해도 토해지지 않는 헛구역질을 하는 나를 어머님은 수세미같이 껄끄런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쓸어내리며, 저녁밥을 굶은 나에게, 그래도 밥이 약이란다. 밥이 약이라는 말이 하도 우스워서 나는 똥줄이 따라나와도 나오지 않는 쓰디쓴 토사물과 우스워서 나오는 눈물까지 질금질금 텃논 벼포기 사이에 쏟으면서, 논을 떠나 앞산에서 와르르와르르 데모하는 풀벌레 소리와 물소리를 뚝뚝 끊어 들으며 따라나오지 않는 그 무엇이, 그 무엇이 손에 잡힐 듯, 눈물이 질금거리는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그 무엇이, 그것은 아마 영원히 빠져나오지 않을 이 시대의 피 묻은 사랑 피 묻은 시 같은, 동강난 내 조국의 피비린 아우성의 손짓도 같은, 저 캄캄한 땅속에서 서로 얽힌 강변의 저 거대한 뿌리 같은, 아아, 아버지, 거름 한짐 산처럼 가득 지고 저문 앞산을 오르는 그 힘에 겨운 모습, 아아 아아 아버지, 농약을 뿌리며, 그 틉틉하고 무서운 농약을 살포하시며 내가 논을 죽이고 논이 나를 죽인다며 울먹이던 아버지 같은 모습이.
억억 다시 내 온몸이 따라갈 것 같은, 끝끝내는 우르르우르르 무너져야 할 이 한반도의 그 무엇이…… 배후가 없어도 피어나는 들꽃들 같은 그 줄기찬 무엇이.
달이 진다. 둥둥 열에 떠서 지신 날 밤 달이 진다. 창호지문에 달빛이 서서히 점점 가만히 떠난다. 사라진다. 떠나간다.
들린다. 낮아진 가장 낮아진 새벽 물소리 숨죽인 몇 마리 풀벌레 울음소리. 어머님 불때는 후두둑후두둑 나무 타는 소리. 닭 울음소리 음매음매 송아지 울음소리. 새소리. 밥솥 여닫는 소리에 따라오는 밥 냄새. 아아 밥 냄새. 아아아 밥과 사랑과 시에서 향기가 나는 나라. 일과 놀이가 서로 불쌍하지 않은 나라……
내 뱃속은 시방 텅텅 비어 아침 물소리가, 세상 깨어나는 소리가 혁명같이 들린다. 쏟아진다. 떨어진다. 아아 설사같이 걷잡을 수 없는 아아 배가 혁명적으로 고프다.
꽃산 가는 길, 창작과비평사, 1988
김용택 시인 / 사랑을 위하여
그대와 내가 처음 사랑에 눈뜰 때 이 세상이 반짝 깨져 새로워지고 눈부시던 날 우리는 우리들의 동강난 조국에 눈떠 그대와 내가 그렇게 서로 바라볼 때 우리들에게 여직 통했던 말들은 소용없어 전라도나 함경도 어느 한쪽의 말로는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사랑 지을 수 없는 아픔으로 우리 사랑은 겨울 풀잎들보다 멀리 흔들리며 발목에 얼음이 잡혀 거부할수록 얼음은 살을 파고들었습니다 아아, 슬픔도 괴로움도 사랑도 그리움도 말 안되어 나오는 애처로움으로 서로 껴안으며 흘리는 이 더운 핏방울 그대와 내가 그렇게 처음 사랑에 눈떠 서로 손 달 때 차가움과 뜨거움에 놀란 가슴으로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는 거역의 몸짓들이 우리를 더 가까이 불러들이는 끌림으로 얼음이 얼음을 불러 생살을 파고들어 피 흘릴지라도 뿌리로 실뿌리로 칭칭 얽혀 피 통하여 얼어오는 우리들의 몸을 녹일 수만 있다면 저 물의 가장 차가운 곳을 녹일 수만 있다면 우리 남은 피 한방울 끝까지 다 흘리며 우리들은 여러 번 멀리 헤어지고 그러나 우리는 한 번도 헤어지지 않는 한 몸으로 한 땅덩어리로 그대와 내가 처음 사랑에 눈뜰 때 이 세상이 반짝 깨져 이 세상이 새로 살아나던 그 눈부신 사랑을 위하여.
그리운 꽃편지, 풀빛,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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