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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 / 오늘은 내 안에
1
내 안의 울 속에서 밤낮없이 으르렁대는
저 사나운 짐승의 정체는 무엇일까?
무슨 먹이라도 보았는가? 오늘은 길길이 뛰고 있다.
2
내 안의 바다 위를 정처없이 표류하는
저 닻 없는 쪽배의 기항지(寄港地)는 어디일까?
파도가 거센가보다. 오늘은 몹시도 흔들린다.
3
내 안의 허공 속을 끝없이 나래 펴는
저 파랑새의 꿈은 언제 어디서 이뤄질까?
불멸의 그 동산을 그려본다. 영원이 오늘은 내 안에 있다.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90
구상 시인 / 우음(偶吟) 2장(章)
1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도 맛본다.
2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까마귀, 홍익사, 1981
구상 시인 / 월남기행(越南紀行)
나는 어디서 날아온지 모르는 메시지 한 장을 풀려고 무진 애만 쓰다 돌아왔다.
꾸몽고개 야자수 그늘에서 봉다워 바닷가에서 아니 사이공의 아오자이 낭자(娘子)와 마주앉아서도 오직 그것만을 풀려고 애를 태다 돌아왔다.
아마 그것은 베트콩이 뿌린 전단(傳單)인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나트랑 고아원(孤兒院)서 만난 월남(越南)소년의 장난인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어느 특무기관(特務機關)이 나의 사상(思想)을 시험하기 위한 조작(造作)인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로마교황(敎皇)의 평화를 호소하는 포스타인지 모른다.
아니 그것은 우리의 어느 용사(勇士)가 남겨놓고 간 유서(遺書)인지도 모른다.
마치 그것은 흐르는 눈물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고랑쇠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포탄(砲彈)으로 뻥 뚫린 구멍 모양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사지(四肢)를 잃은 해골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눈감지 못한 원혼(寃魂)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월남(越南) 이야기인 것도 같고
그런데 그것은 나 개인의 문제인 것도 같고
그런데 그것은 우리 민족에 관련한 것도 같고
아니 그것은 보다 더 인류와 세계에 향한 강렬한 암시(暗示) 같기도 하였다.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오직 느낀 것이 있다면 나란 인간(人間)이 아니 인류(人類)가 아직도 깜깜하다는 것뿐이다.
나는 그 메시지를 풀다 풀다 못하여 이제 고국(故國)에 돌아와서까지 이렇듯 광고(廣告)한다.
백지(白紙) 위에 선혈(鮮血)로 그려진 의문부(疑問符)
`?'
그게 무엇이겠느냐?
* 이 시는 내가 1967년 11월 월남을 시찰하고 쓴 유일(唯一)의 작품으로 자유월남 정부군에게 전세(戰勢)가 유리하고 더구나 파월국군은 승승장구하던 때였지만….
구상문학선,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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