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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몽구 시인 / 고향은 우리들을 떠나 보낸다
지금도 복사꽃이 환히 피는 마을 가도가도 왼통 갈라 터진 들판 창대비에 떠내려간 밭작물을 가꾸러 어머니들이 허리를 구부린 채 바삐 뛰어 다니는 마을 서울의 공장들로 처녀 총각들 다 빼앗기고 꼬부랑 노인들과 과부들이 일하는 마을 날림 상품들이 그득한 수퍼마켓 곁에서 개똥 참외들이 오들오들 떠는 마을 마을 사람들은 맨발로 서서 우리들을 떠나 보낸다 곳곳의 신작로에 차단기가 지켜설 때 아아 나는 총뿌리였다 광복 삼십년이 지나서도 더욱 들이미는 일본 열도의 가슴을 헤치는 칼이었다 튀기는 피였다 우리들의 가여운 친구들을 목조르는 마을은 우리들을 서울로 서울로 떠나 보냈고 빛을 찾아 밤에게서 떠난 나는 북북 피터진 엉덩이였다 갈라진 땅을 연결하는 함성이었다 한 불행이 깊어져 더 큰 불행을 부르는 밤을 자르는 칼날이었다 외침이었다 나의 외침을 누군가의 불타는 가슴에 심어 주었을 때 고향의 갇혀 있던 혼곤한 머리는 깨어나고 야윈 주먹은 쥐어졌다 그 밤으로 고향은 우리들을 떠나 보낸다 작은 미물에서부터 거대한 소리까지가 일어서고 그 밤으로 고향은 우리들을 떠나 보낸다
거기 너 있었는가, 청사, 1984
박몽구 시인 / 닫힌 거리로 창을 열고
철쭉꽃 타는 정든 언덕을 버리고 쫓기다 쫓기다 번거로운 그림자도 버리고 떠돌이별이 된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신다 찰랑거리는 풀잎마다 추녀 끝마다 떠도는 혼들 벗은 발로 떨고 있는 고향쪽으로 창을 열고 닫힌 거리로 창을 열고 고개를 돌린 채 지나가는 울긋불긋한 사람들을 부른다 눈물로 목메임으로 객지밥을 삼키면서 믿기지 않던 우리들 오랫만의 만남은 많은 말을 낳을 법도 한데 반 페이지도 메꾸기 힘들어 입다문 채 속으로 속으로 다행한 저녁의 아가리로 휘말려 들어 가는 사람들을 부른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밤새 부대끼게 하는 거친 손을 떼어내다가 숨진 친구의 눈을 감겨 주고 온 친구와 함께 골목마다 늘어선 보호자들 곁의 빙판을 용케용케 비켜 가는 사람들을 부른다 몇년째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형들의 안부 묻고 싶어 백주의 거리를 헤매며 빼앗긴 아들의 이름을 왼종일 부르는 어머니의 찬 손 녹이고 싶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에 타는 불에 비추어 보고 싶어 이제 막 헤어지려는 사람들을 부른다 닫힌 거리로 창을 열고
<거기 너 있었는가, 청사, 1984>
박몽구 시인 / 동숭동 퇴근길에서
해질 무렵 낙산 하늘에 잿빛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피곤한 어깨들을 매만지며 매만지며 옷깃을 추스리며 값싼 휴식을 찾아 술집으로 눈꽃을 털며 들어서기도 하고 날개도 없이 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가는 사람들 저 하늘이 먹빛으로 바뀌면 지친 사람들의 눈빛을 게슴츠레 빛나게 만드는 울긋불긋 벌거벗은 연극 포스터들도 빈 방들을 찾아 잦아들고 "총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말라" 서울대 의과대학에 나붙은 대자보도 슬쩍 입이 틀어막혀 버리는가 얼얼한 한파 앞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막고 귀를 덮고 눈마저 침묵의 땅에 묶은 채 사라지는데 문득 우리들의 하루가 이렇게 값싸게 막 내릴 수는 없다고 낙산 돌무더기를 헤치며 울어대는 참새 소리 쟁쟁하네 그 울음소리를 따라 찬 바람에 휘날리던 석간신문 한 장 눈물 흘리고 있네 구로구청에서 거짓 민의가 담긴 투표함을 끝까지 지키다가 옥상에서 떠밀려 반신불수가 된 한 젊은이 치료비를 낼 형편도 못 되고 친구들은 모두 학교로 돌아갈 채비를 서두를 시간에 병상에서 휠체어를 타지 못할 몸으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소식 하나 떠돌아 다니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손을 접는 시간에 참새들은 더욱 메마른 돌무더기를 헤쳐 새 목숨을 찾고 이대로 오늘 막을 내릴 수는 없다는 듯 낙산 쪽에서 잿빛 하늘을 뚫고 뭉클 붉은 노을이 타오른다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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