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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두석 시인 / 달팽이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9.

최두석 시인 / 달팽이

 

 

임진강물이 역류해 들어오는 문산천, 초병의 총구가 무심히 햇빛에 빛나는 유월 어느날, 기슭에 수양버들 한 그루, 그 아래 화강암 돌비 하나. 너무 한적해서 간혹 물거품을 터뜨리는 냇물 속에 조용히 잠겨 있던 달팽이 무리, 그 달팽이 무리가 뻘흙 위로 상륙한다. 굼실굼실 기슭의 수양버들 밑둥으로 기어 오른다. 제각기 등에 집을 진 채 동둑으로 뻗은 밋밋한 가지를 타고 달팽이의 느릿한 행렬이 이어진다. 마침내 가지 끝에서 온몸을 집 속에 감추고 굴러 떨어진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달팽이는 계속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코를 쥐고 떨어진다. 버들가지 속잎이 파르르 파르르 떨리는 그 아래 풀밭에 떨어진 놈은 다시 물을 찾아 굼실거리고 돌비 위로 떨어진 놈은 당장 깨져 죽는다. 달팽이의 시신이 널어 말려지는 돌비, 돌비에는 핏빛 글씨로 `간첩사살기념비'라 씌어 있다. 그때 초병이 걸어와 돌비 앞에서 거수경례를 붙이고 그의 군화 밑에는 굼실거리던 달팽이 몇 마리 깔려 있다.

 

성에꽃, 문학과지성사, 1990

 

 


 

 

최두석 시인 / 담양장

 

 

죽장의 김삿갓은 죽고

참빗으로 이 잡던 시절도 가고

대바구니 전성 시절에

 

새벽 서리 밟으며 어머니는 바구니 한 줄 이고 장에 가시고 고구마로 점심 때운 뒤 기다리는 오후, 너무 심심해 아홉 살 내가 두 살 터울 동생 손 잡고 신작로를 따라 마중갔었다. 이십 리가 짱짱한 길, 버스는 하루에 두어 번 다녔지만 꼬박꼬박 걸어오셨으므로 가다보면 도중에 만나겠지 생각하며 낯선 아줌마에게 길도 물어가면서 하염없이……그런데 이 고개만 넘으면 읍이라는 곳에서 해가 덜렁 졌다. 배는 고프고 으스스 무서워져 한참 망설이다가 되짚어 돌아오는 길은 한없이 멀고 캄캄어둠에 동생은 울고 기진맥진 한밤중에야 호롱 들고 찾아 나선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그날 따라 버스로 오시고

 

아, 요즘도 장날이면

허리 굽은 어머니

플라스틱에 밀려 시세도 없는 대바구니 옆에 쭈그려앉아

멀거니 팔리기를 기다리는

담양장.

 

성에꽃, 문학과지성사, 1990

 

 


 

최두석(崔斗錫, 1956 ~ ) 시인

문학 평론가. 전남 담양 출생. 서울대학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0년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대꽃'(1984), '성에꽃'(1990), '꽃에게 길을 묻는다'(2003) 등이 있다. 강릉대학교(현 강릉원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1991~1997)를 거쳐 현재 한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1997~)로 재직하면서, 계간 《실천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2007년 제2회 「불교문예작품상」, 2010년 제3회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다. 1980년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2007년 제2회 「불교문예작품상」, 2010년 제3회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