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기원 시인 / 양파를 먹으며
양파 구매신청으로 양파를 사서 양파 한 알로 가다밥 한 덩이를 모두 삼킨다. 코도 맵고 눈도 맵지만 까짓 대수랴. 양파는 신선하고 비타민이 풍부하고……살아야지. 더 이상 갈 데 없이 끝까지 온 사람들과 함께.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
송기원 시인 / 월남에의 기억 1
캄란에서 나트랑까지 환자 수송용 헬리콥터에 실려 비행해 갔다. 이 나라에 번져있는 민족주의처럼 열대수림들이 나타나고 부스럼같은 가건물의 마을과 한번 쯤은 AP통신의 사진기자에게 자료가 되었을 법한 노인과 아이들의 떼가 모여있는 광장이 나타나고 나는 새삼스럽게 약소국을 생각했다.
총성이 울리면 쓰러지는 것은 사상이 아니다. 나의 심장을 향해 총을 겨누고 상처를 입힌 것은 얼굴이 누렇고 키가 작은 아시아인, 그러나 나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적이 되는지, 사상과 인간의 함수관계는 무엇이 되는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내가 겨누었던 총구의 구멍과 저 편의 구멍 뿐.
그러나 이러한 곳에도 역시 꽃이 피고 풀잎에 이슬이 맺히고, 상처 입지 않은 영혼처럼 눈부신 아침 해가 떠오른다는 것 뿐.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
송기원 시인 / 인상(印象) 1
폭풍이 밀려온다. 더욱 낮게 움추린 지붕과 무지(無知)한 전답 위로 새떼들이 피신하고, 날개 상한 몇 마리가 떨어져 죽고 배면(背面)으로 붉게 물든 비가 내린다. 파리한 얼굴의 사내들이 전선에 감전되고 몸부림처럼 깜박이던 그들의 운명이 꺼진다.
쓰러진 담벼락과 비틀대는 골목을 걸어나와 개가 한 마리 붉은 비를 짖는다. 개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스스로의 쇠사슬을 짖는다. 모든 풍경을 파괴하면서, 폭풍보다 더 깊이 개가 짖고, 파괴된 풍경 위에 사내들의 잠만이 희게 감전되어 남는다.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최호남 시인 / 봄과 폐차장 (0) | 2020.03.19 |
|---|---|
| 김용택 시인 / 마당은 비뚤어졌어도 장구는 바로 치자 외 2편 (0) | 2020.03.19 |
| 기형도 시인 / 오래된 서적(書籍) 외 1편 (0) | 2020.03.19 |
| 구상 시인 / 여명도(黎明圖) 외 2편 (0) | 2020.03.19 |
| 문덕수 시인 / 풀잎 소곡 외 2편 (0) | 2020.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