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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상 시인 / 여명도(黎明圖)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9.

구상 시인 / 여명도(黎明圖)

 

 

동이 트는 하늘에

까마귀 날아

 

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

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

 

이윽고

북이 울자

원한에 이끼 낀 성문이 뻐개지고

구렁이 잔등같이 독이 서린 한길 위를

횃불을 든 시빌*이

깨어라!

외치며 백마(白馬)를 달려.

 

말굽 소리

말굽 소리

창칼 부닥치어

살기(殺氣)를 띠고

백성들의 아우성

또한 처연(凄然)한데

 

떠오는 태양 함께

피 토하고

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고웁다.

 

* 카스바: 북아프리카 알제시(市)에 있는 암흑가. 프랑스 영화 `망향'의 무대가 됨.

** 시빌: 희랍어로 선지자(先知者).

 

구상시집, 청구출판사, 1951

 

 


 

 

구상 시인 / 오늘

 

 

오늘도 신비(神秘)의 샘인 하루를

구정물로 살았다.

 

오물과 폐수로 찬 나의 암거(暗渠) 속에서

그 청렬(淸冽)한 수정(水精)들은

거품을 물고 죽어갔다.

 

진창 반죽이 된 시간의 무덤!

한 가닥 눈물만이 하수구를 빠져나와

이 또한 연탄빛 강에 합류한다.

 

일월(日月)도 제 빛을 잃고

은총의 꽃을 피운 사물들도

이지러진 모습으로 조응(照應)한다.

 

나의 현존(現存)과 그 의미가

저 바다에 흘러들어

영원한 푸름을 되찾을

그날은 언제일까?

 

구상연작시집, 시문학사, 1985

 

 


 

 

구상 시인 / 오늘서부터 영원을

 

 

오늘도 친구의 부음(訃音)을 받았다.

모두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차피 가는구나.

 

나도 머지않지 싶다.

 

그런데 죽음이 이리 불안한 것은

그 죽기까지의 고통이 무서워설까?

하다면 안락사(安樂死)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두려운 것은

죽은 뒤가 문제로다.

저 세상 길흉이 문제로다.

 

이렇듯 내세를 떠올리면

오늘의 나의 삶은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

 

내세를 진정 걱정한다면

오늘서부터 내세를,

아니 영원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90

 

 


 

구상(具常 1919년-2004년) 시인. 언론인

본명 구상준(具常浚). 호(號)는 운성(暈城). 1919년 9월 16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성부 출생. 1941년 일본대학 종교과를 졸업했다. 1946년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동인시집 〈응향 凝香〉에 〈길〉·〈여명도 黎明圖〉·〈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여기에 실린 작품들이 강홍운·서창훈 등의 시와 함께 회의적·공상적·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으로부터 '반동작가'로 몰리자 이듬해 월남했다. 〈백민〉에〈발길에 채인 돌멩이와 어리석은 사나이〉(1947)·〈유언〉(1948)·〈사랑을 지키리〉(1949) 등을 발표했으며, 〈영남일보〉·〈경향신문〉 등의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1년 첫 시집 〈구상시집〉을 펴냈고, 1956년 6·25전쟁을 제재로 한 시집 〈초토의 시〉를 펴내 1957년 서울특별시문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