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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 / 여명도(黎明圖)
동이 트는 하늘에 까마귀 날아
밤과 새벽이 갈릴 무렵이면 카스바*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
이윽고 북이 울자 원한에 이끼 낀 성문이 뻐개지고 구렁이 잔등같이 독이 서린 한길 위를 횃불을 든 시빌*이 깨어라! 외치며 백마(白馬)를 달려.
말굽 소리 말굽 소리 창칼 부닥치어 살기(殺氣)를 띠고 백성들의 아우성 또한 처연(凄然)한데
떠오는 태양 함께 피 토하고 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고웁다.
* 카스바: 북아프리카 알제시(市)에 있는 암흑가. 프랑스 영화 `망향'의 무대가 됨. ** 시빌: 희랍어로 선지자(先知者).
구상시집, 청구출판사, 1951
구상 시인 / 오늘
오늘도 신비(神秘)의 샘인 하루를 구정물로 살았다.
오물과 폐수로 찬 나의 암거(暗渠) 속에서 그 청렬(淸冽)한 수정(水精)들은 거품을 물고 죽어갔다.
진창 반죽이 된 시간의 무덤! 한 가닥 눈물만이 하수구를 빠져나와 이 또한 연탄빛 강에 합류한다.
일월(日月)도 제 빛을 잃고 은총의 꽃을 피운 사물들도 이지러진 모습으로 조응(照應)한다.
나의 현존(現存)과 그 의미가 저 바다에 흘러들어 영원한 푸름을 되찾을 그날은 언제일까?
구상연작시집, 시문학사, 1985
구상 시인 / 오늘서부터 영원을
오늘도 친구의 부음(訃音)을 받았다. 모두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차피 가는구나.
나도 머지않지 싶다.
그런데 죽음이 이리 불안한 것은 그 죽기까지의 고통이 무서워설까? 하다면 안락사(安樂死)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래도 두려운 것은 죽은 뒤가 문제로다. 저 세상 길흉이 문제로다.
이렇듯 내세를 떠올리면 오늘의 나의 삶은 너무나 잘못되어 있다.
내세를 진정 걱정한다면 오늘서부터 내세를, 아니 영원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유치찬란, 삼성출판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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