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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순 시인 / 엄마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9.

김혜순 시인 / 엄마

 

 

나는 엄마다

딸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내가 또 새끼를 근엄하게 훈계하고

먹여서 기르니

나는 엄마다

엄마이기 때문에

나는 엄마 행세를 한다

그건 안 돼!

하지 마!

때릴 거야!

 

그 전엔 난 엄마가 아니었다

어렴풋한 기억 저편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두 눈이 전우주를 향해 열려 있고

손가락들이 해왕성 명왕성을 꼬집고 놀 때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나의 엄마도 나에게 엄마 행세를 했다

별 떨어질라 푸르른 창공 아래엔

지붕을 덮고

바람 불라 넓은 벌판 한가운데

벽을 세우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시야를 좁게 가져라

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

영혼을 아무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엄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자식의 시야에 칸을 지르고

널푸른 영혼에 금을 긋고

우물을 파는

자못 교훈적인 엄마가 되었다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김혜순 시인 / 여자들

 

 

우리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슬픔으로 견디겠다고

나는

썼던가 내가 사랑하는……이라고

청승을 떨었던가 아니면 참혹한 여름이라고

엄살을 떨었던가 너 떠나고 나면 이 세상에 남은

네 생일날은 무슨 날이 되는 거냐고 물었던가

치마폭에 감추면 안 되겠냐고 영화속에서처럼 그러면

안 되겠냐고

 

문을 쾅쾅 두드리며 그들은 올까

모든 전쟁의 문이 열리고

모든 전쟁의 문을 막아서며 없어요 없어요

고개를 젓는 여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치마폭을 감추면 안 되겠냐고…… 치마폭에 한 남자를 감춘 여자가 총을 맞고 쓰러진다. 남자는 지금 막 숨이 끊어진 여자의 피를 벌컥벌컥 마신다. 소파의 솜을 다 뜯어내고 한 여자가 거기에 그를 숨길 방을 만든다. 피아노 속을 다 뜯어내고 여자가 그 속에 그의 침대를 숨긴다. 그 피아노는 건반을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항아리에 결사적으로 걸터앉은 여자가 소리친다.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헛간에까지 쫓긴 여자가 지푸라기 속에 감춘 남자 위에 드러눕는다.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그들이 지푸라기 위에 불을 싸지른다.

 

이 다음에 난 죽은 다음에

내 딸은 나를 어떻게 떠올릴까

 

이마를 다 뜯어내고

아무도 몰래 다락방을 만든 엄마

밤이 무거워 잠이 안 와

자다 일어나 안경을 쓰고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잠꼬대하는 그런 엄마

 

비녀 꽂을 머리칼도 몇 가닥 남지 않은 할머니

지팡이에 온몸을 의지한 채

저녁마다 언덕에 올라 동구

밖 내려다보시며

민대머리 절레절레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무화과나무 한 그루 그 큰 손바닥으로

꽃도 안 피우고 맺은 열매를 가리고

비 맞고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강원대학교 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국어국문학 박사.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 로 등단. 1997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2000년 제1회 「현대시작품상」, 2000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 수상. 시집  『또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여행기』, 『들끓는 사랑』 등이 있음. 2002 문학계간지 파라21 편집위원. 2000 시전문계간지 포에지 편집위원.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