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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인 / 엄마
나는 엄마다 딸이 나를 엄마라고 부르고 내가 또 새끼를 근엄하게 훈계하고 먹여서 기르니 나는 엄마다 엄마이기 때문에 나는 엄마 행세를 한다 그건 안 돼! 하지 마! 때릴 거야!
그 전엔 난 엄마가 아니었다 어렴풋한 기억 저편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두 눈이 전우주를 향해 열려 있고 손가락들이 해왕성 명왕성을 꼬집고 놀 때 나에게도 엄마가 있었다 나의 엄마도 나에게 엄마 행세를 했다 별 떨어질라 푸르른 창공 아래엔 지붕을 덮고 바람 불라 넓은 벌판 한가운데 벽을 세우는 엄마가 있었다 엄마는 늘 말씀하셨다 시야를 좁게 가져라 저 까만 우물을 향해 투신해라 영혼을 아무데나 흘리고 다녀선 안 된다 그래서 나도 엄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자식의 시야에 칸을 지르고 널푸른 영혼에 금을 긋고 우물을 파는 자못 교훈적인 엄마가 되었다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김혜순 시인 / 여자들
우리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슬픔으로 견디겠다고 나는 썼던가 내가 사랑하는……이라고 청승을 떨었던가 아니면 참혹한 여름이라고 엄살을 떨었던가 너 떠나고 나면 이 세상에 남은 네 생일날은 무슨 날이 되는 거냐고 물었던가 치마폭에 감추면 안 되겠냐고 영화속에서처럼 그러면 안 되겠냐고
문을 쾅쾅 두드리며 그들은 올까 모든 전쟁의 문이 열리고 모든 전쟁의 문을 막아서며 없어요 없어요 고개를 젓는 여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치마폭을 감추면 안 되겠냐고…… 치마폭에 한 남자를 감춘 여자가 총을 맞고 쓰러진다. 남자는 지금 막 숨이 끊어진 여자의 피를 벌컥벌컥 마신다. 소파의 솜을 다 뜯어내고 한 여자가 거기에 그를 숨길 방을 만든다. 피아노 속을 다 뜯어내고 여자가 그 속에 그의 침대를 숨긴다. 그 피아노는 건반을 두드려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항아리에 결사적으로 걸터앉은 여자가 소리친다.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헛간에까지 쫓긴 여자가 지푸라기 속에 감춘 남자 위에 드러눕는다.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그들이 지푸라기 위에 불을 싸지른다.
이 다음에 난 죽은 다음에 내 딸은 나를 어떻게 떠올릴까
이마를 다 뜯어내고 아무도 몰래 다락방을 만든 엄마 밤이 무거워 잠이 안 와 자다 일어나 안경을 쓰고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잠꼬대하는 그런 엄마
비녀 꽂을 머리칼도 몇 가닥 남지 않은 할머니 지팡이에 온몸을 의지한 채 저녁마다 언덕에 올라 동구 밖 내려다보시며 민대머리 절레절레 없어요 없어요 난 안 감췄어요
무화과나무 한 그루 그 큰 손바닥으로 꽃도 안 피우고 맺은 열매를 가리고 비 맞고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다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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