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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덕수 시인 / 풀잎 소곡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19.

문덕수 시인 / 풀잎 소곡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그대 가슴 속 꽃밭의 후미진 구석에

가녀린 하나 풀잎으로 돋아나

그대 숨결 끝에 천 년인 듯 살랑거리고

글썽이는 눈물의 이슬에 젖어

그대 눈짓에 반짝이다가

어느 늦가을 자취 없이 시들어 죽으리.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지금은 전생의 숲속을 헤매는 한 점 바람

그대 품 속에 묻히지 못한 씨앗이라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한 뼘만큼의 공간

 

 

두 개의 손바닥이 이렇게 가까이

두 개의 잎사귀가 이렇게 가까이

한 뼘만큼의 공간을 두고 가까이 왔다.

한쪽이 한 치쯤 다가서면

한쪽은 또 그만큼 물러서고

그렇게 서로 영원히 마주보면서

한 뼘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한 삶인 것처럼.

한 나무를 떠난 천 년 뒤의 해후,

한 영혼을 떠난 만 년 후의 대면,

헤매다가 헤매다가 마침내 찾았으나

더 이상 떨어질 수도 없는

더 이상 붙을 수도 없는

한 뼘만큼의 절대한 공간.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행복

 

 

사르비아꽃을 짓이겨선 기둥을 세우고

연(蓮)꽃을 짓이겨선 기와를 굽고

국화꽃을 짓이겨선 벽을 만들고

천축모란(天竺牡丹)으로 가락지 같은 문을 짜서

그 만년의 꽃집 속에 꿈이 살고

그 속에 우리가 산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文德守) 시인

1928년 경상남도 함안 출생. 호는 심산(心山), 청태(靑笞)이다. 홍익대학교 국문과 및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1956년 {현대문학}에 <침묵>, <화석>, <바람 속에서>가 추천되어 등단. 1964 현대문학상•1978 현대시인상•1981년 아카데미 학술상•1985 펜문학상 수상. 시집: {황홀}(1956), {선(線)·공간(空間)}(1966), {새벽바다}(1975), {영원한 꽃밭}(1976),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1980), {다리놓기}(1982), {문덕수시선}(1983), {조금씩 줄이면서}(1985), {그대, 말씀의 안개}(1986) 등. 현재 홍익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