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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덕수 시인 / 풀잎 소곡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그대 가슴 속 꽃밭의 후미진 구석에 가녀린 하나 풀잎으로 돋아나 그대 숨결 끝에 천 년인 듯 살랑거리고 글썽이는 눈물의 이슬에 젖어 그대 눈짓에 반짝이다가 어느 늦가을 자취 없이 시들어 죽으리. 내사 아무런 바람이 없네. 지금은 전생의 숲속을 헤매는 한 점 바람 그대 품 속에 묻히지 못한 씨앗이라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한 뼘만큼의 공간
두 개의 손바닥이 이렇게 가까이 두 개의 잎사귀가 이렇게 가까이 한 뼘만큼의 공간을 두고 가까이 왔다. 한쪽이 한 치쯤 다가서면 한쪽은 또 그만큼 물러서고 그렇게 서로 영원히 마주보면서 한 뼘의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절대한 삶인 것처럼. 한 나무를 떠난 천 년 뒤의 해후, 한 영혼을 떠난 만 년 후의 대면, 헤매다가 헤매다가 마침내 찾았으나 더 이상 떨어질 수도 없는 더 이상 붙을 수도 없는 한 뼘만큼의 절대한 공간.
새벽바다, 성문각, 1975
문덕수 시인 / 행복
사르비아꽃을 짓이겨선 기둥을 세우고 연(蓮)꽃을 짓이겨선 기와를 굽고 국화꽃을 짓이겨선 벽을 만들고 천축모란(天竺牡丹)으로 가락지 같은 문을 짜서 그 만년의 꽃집 속에 꿈이 살고 그 속에 우리가 산다.
새벽바다, 성문각,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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