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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혜순 시인 / 일몰(日沒)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3. 20.

김혜순 시인 / 일몰(日沒)

 

 

노을 속에 머리칼을 처박고

서 있다 보면,

나의 발부터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밤의 정체를 숨죽여 바라보다 보면,

긴 행렬을 짓고

개울을 가로질러 가는

물새떼들을 보다 보면

뒤따라 슬픔이 자르듯이

가슴이 새겨지는 것을 보다 보면,

얼굴엔 눈물이

생선 비늘처럼 꽂히는 것을

강물에 비춰보다 보면,

나무들이 이리저리 돌아서고

들판이 한없이 접히는 것을 어지러워하다 보면,

느닷없이

플레쉬를 터뜨리듯

내 뺨에 철썩 처얼썩 떨어지는

그의 손바닥을 보다 보면

내 얼굴에서 강둑에 떨어져 번득이는

비늘을 보다 보면, 내 눈알을 쏘아보다 보면

비상 먹은 달이

팽팽하게 떠올라오지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김혜순 시인 / 죽을 줄도 모르고

 

 

죽을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데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먼지를 털며 돌아온다

죽은 여자의 관 옆에

이불을 깔고

허리를 굽히면

메마른 머리칼이 쏟아져 쌓이고

차가운 이빨들이 입 안에서 쏟아진다

그 다음 주름진 살갗이

발 아래 떨어지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마디 쩝쩝거리며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 올린다.

 

어느 별의 지옥, 청하, 1988

 

 


 

 

김혜순 시인 / 참 오래 된 호텔

 

 

참 오래 된 호텔.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강가에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 가슴속엔 1992, 1993……번호가 매겨진 방들이 있고, 내가 투숙한 방 옆에는 사랑하는 그대도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그런 호텔. 내 가슴 속에 호텔이 있고, 또 호텔 속에 내가 있다. 내 가슴 속 호텔 속에 푸른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고, 또 그 침대 속에 내가 누워 있고, 또 드러누운 내 가슴 속에 그 호텔이 있다. 내 가슴 속 호텔 밖으로 푸른 강이 구겨진 양모의 주름처럼 흐르고,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가 내 머리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술 마시고 머리 아픈 내가 또 그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내 쪽으로 세게 당겨야 열리는 창문 앞에 나는 서 있기도 한다. 호텔이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복도론 붉은 카펫 위를 소리나지 않는 청소기가 지나고, 흰 모자를 쓴 여자가 모자를 털며 허리를 펴기도 한다. 내 가슴속 호텔의 각 방의 열쇠는 프런트에 맡겨져 있고, 나는 주머니에 한 뭉치 보이지 않는 열쇠를 갖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슴 속 그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 갈 수가 없다. 아, 밤에는 그 호텔 방들에 불이 켜지든가? 불이 켜지면 나는 내 담요를 들치고, 내 가슴 속 호텔 방문들을 열어제치고 싶다. 열망으로 내 배꼽이 환해진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방문이 열리지 않을 땐 힘센 사람을 부르고 싶다. 비 맞은 고양이처럼 뛰어가기도 하는 호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창 밖으로 내던지기도 하는 그런 호텔. 그 호텔 복도 끝 괘종시계 뒤에는 내 잠을 훔쳐간 미친 내가 또 숨어 있다는데. 그 호텔. 불 끈 밤이 되면, 무덤에서 갓 출토된 왕관처럼 여기가 어디야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자다가 일어나서 보면 내가 봐도 낯선 호텔. 낸 몸 속의 모든 창문을 열면 박공 지붕 아래, 지붕을 매단 원고지에서처럼 칸칸마다 그대가 얼굴을 내미는 호텔. 아침이 되면 강물 속으로 밤고양이처럼 달아나 강물 위로 다시 창문을 매다는 그런 호텔.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김혜순 시인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강원대학교 국문학과와 건국대학교 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 국어국문학 박사.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에  '담배를 피우는 시체' 로 등단. 1997년 제16회 「김수영문학상」, 2000년 제1회 「현대시작품상」, 2000년 제15회 「소월시문학상」, 2006년 제6회 「미당문학상」, 2008년 제16회 「대산문학상」 수상. 시집  『또다른 별에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달력 여행기』, 『들끓는 사랑』 등이 있음. 2002 문학계간지 파라21 편집위원. 2000 시전문계간지 포에지 편집위원. 현재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