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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시인 / 컬러 킬러의 흑백 사체
정오의 까마귀가 울고 비밀쪽지가 Karma Police에 배달된다 알파벳 서장! 난 당신이 추적중인 연쇄살해범 제로요 밤마다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소 죽은 자들이 죽은 말을 타고 나의 침실로 달려오는 악몽에 시달리고 있소 부탁이오 오늘밤 나를 죽여주시오
서장은 옥상으로 올라간다 동쪽 도로를 바라본다 권태롭다 서쪽 광장을 바라본다 권태롭다 남쪽 로봇단지를 바라본다 권태롭다 북쪽 비행장을 바라본다 권태롭고 권태롭다 탄환을 장전하고 쪽지에 그려진 약도를 따라 제로가 머무는 모래빌딩으로 간다
2층 옆에 3층이 있다 3층 위에 1층이 있고 2층 밑에 4층이 있다 지하실은 유폐된 섬처럼 공중에 떠 있다 빌딩 밖으로 우주선들이 날고 있다 서장은 나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타임실험실로 간다 시계들이 흰 피를 흘리는 벽 아래 제로가 울고 있다 어깨엔 날개가 등엔 붉은 지느러미가 돋아 있다
바닥엔 세계지도가 음각으로, 천장엔 우주의 천궁도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서장이 발을 옮길 때마다 벽에서 모래가 흘러내린다 오른쪽 창으로 고대의 설원이 보인다 왼쪽 창으로 3천년 후의 지구가 보이고 어둠 속으로 무수히 명멸해가는 행성들이 보인다
제로가 고통스럽게 말한다 난 시간의 몸이오 난 더 이상 불멸을 원하지 않소 불멸은 환멸이오 어서 나를 사살하시오 서장은 말없이 제로의 눈을 바라보다 권총을 발사한다 탄환이 제로의 심장에 정확히 명중된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텅 빈 진공이다
갑자기 제로가 차디차게 웃는다 길고 파란 혀로 서장의 목을 휘감고는 얼굴을 핥는다 서장의 관자놀이에 총을 대고 말한다 알파벳 서장! 내게 죄의식이란 털끝만큼도 없소 잘 가시오 탕! 서장의 뇌를 관통한 탄환이 어둠 속을 날아간다 머나먼 미래에서 발사된 탄환이 너의 심장을 향해
웹진 『시인광장』2008년 가을호 발표
함기석 시인 / 무중력 회전체 큐브
Open Your Eyes! Open Your Dream! 이상한 목소리에 잠에서 깬다 큐브다 2079년 여름아침이다 천장에 깔린 관모양의 수면캡슐에 내가 누워 있다 천장모서리에 의자가 거꾸로 붙어 있다 한 노인이 앉아 담배를 피고 있다 노인은 일어나 벽에 수직으로 붙은 화분에 물을 준다 난 자넬세 여긴 제64우주 뫼비우스의 공중기차역이고 지금은 2479년 겨울저녁일세 삼사라 * 기차가 오면 난 곧 떠날 게야 찬 물줄기가 주르르 내 얼굴로 쏟아진다
바닥으로 두 개의 금속창이 보인다 왼쪽 창으로 항구가 보이고 물개들이 보인다 임신한 어머니가 불가사리 해변에 쓰러져 있다 벼랑에서 누군가 몸을 던진다 어머니가 진통하며 나를 낳는다 개가 태반을 물고 벼랑 아래로 달리자 오른쪽 창으로 천 년 전의 몽골초원이 나타난다 초원에 해부대가 놓여 있다 마취도 없이 복제된 7인의 내가 해부되고 있다 공중으로 하얀 돌 하얀 모자들이 떠다니고 문자 없는 책들이 하늘을 날고 있다
큐브를 탈출하려 출구를 찾는다 벽을 밟고 바닥으로 올라간다 다시 반대편 벽을 밟고 천장으로 내려온다 400년이 찰나에 지난다 내 몸은 온통 주름투성이고 머리는 백발로 변해 있다 벽은 온통 가시투성이 넝쿨식물로 뒤덮여 있고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바라본다 천장에 붙은 관모양의 수면캡슐에 또 다른 내가 누워 있다 꿈꾸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한다 Open Your Eyes! Open Your Dream!
*삼사라(Samsara): 흘러가는 것. 끝없는 재탄생의 연결고리로 생명과 죽음이 순환하는 것.
웹진 『시인광장』2008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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