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연호 시인 / 이 많은 여름이 교환되려 한다
흰 건반이 자정인 것처럼 검은 건반은 잠든 사람을 두세 칸 건너뛰며 놓여있었다 부인들은 죽을 날짜를 혹은 생일을 피아노 음계에서 고르고 있었다 계절이 알고 있는 포유류의 음계는 모유 냄새보다 더 좋은 찌그러진 수학여행 버스들
깨진 창을 네 배에 모조리 쓸어담고 반추동물(反芻動物)이 밤새도록 어루만지는 축축한 서너 개의 방에서 파수꾼은 옳다, 혹은 외롭다
그런 날 성인용 기저귀처럼 포도원은 수치스런 곳을 덮어준다 가렸어도 여전히 부끄러운 착용감 드러운 이 생과 이 많은 여름이 교환되려 한다
처음 마주친 생은 내 약점이 일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공회당 옆 묘지, 수학여행길의 아이들은 꺾인 꽃처럼 너덜거리고 내가 날린 종이비행기의 비틀림을 섬뜩해하고 있었다
한 쌍의 다리들이 자정의 건반에 내리는 날 걸을 때마다 음악이 떠오르고 자신을 불태운 사람 곁에서 염소는 가지런히 발을 모은 음식을 깨끗이 하고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2008년 가을호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오규원 시인 / 시인 구보씨의 일일(一日) 1 외 4편 (0) | 2020.05.10 |
|---|---|
| 양성우 시인 / 찬가 외 1편 (0) | 2020.05.10 |
| 함기석 시인 / 컬러 킬러의 흑백 사체 외 1편 (0) | 2020.05.09 |
| 김형술 시인 / 배심원들 외 1편 (0) | 2020.05.09 |
| 홍일표 시인 / 맛있는 계단 외 1편 (0) | 2020.05.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