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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연호 시인 / 이 많은 여름이 교환되려 한다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9.

조연호 시인 / 이 많은 여름이 교환되려 한다

 

 

  흰 건반이 자정인 것처럼

  검은 건반은 잠든 사람을 두세 칸 건너뛰며 놓여있었다

  부인들은 죽을 날짜를 혹은 생일을

  피아노 음계에서 고르고 있었다

  계절이 알고 있는 포유류의 음계는

  모유 냄새보다 더 좋은 찌그러진 수학여행 버스들

 

  깨진 창을 네 배에 모조리 쓸어담고

  반추동물(反芻動物)이 밤새도록 어루만지는

  축축한 서너 개의 방에서

  파수꾼은 옳다, 혹은 외롭다

 

  그런 날 성인용 기저귀처럼 포도원은 수치스런 곳을 덮어준다  

  가렸어도 여전히 부끄러운

  착용감 드러운 이 생과

  이 많은 여름이 교환되려 한다

 

  처음 마주친 생은 내 약점이

  일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공회당 옆 묘지, 수학여행길의 아이들은

  꺾인 꽃처럼 너덜거리고

  내가 날린 종이비행기의 비틀림을 섬뜩해하고 있었다

 

  한 쌍의 다리들이 자정의 건반에 내리는 날

  걸을 때마다 음악이 떠오르고

  자신을 불태운 사람 곁에서 염소는

  가지런히 발을 모은 음식을 깨끗이 하고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2008년 가을호

 

 


 

조연호 시인

충남 천안에서 출생했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으며 199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죽음에 이르는 계절』(천년의시작, 2004)과 『저녁의 기원』(랜덤하우스,  2007)이 있다.  제5회 수주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