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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규원 시인 / 시인 구보씨의 일일(一日) 1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0.

오규원 시인 / 시인 구보씨의 일일(一日) 1

원제 : 시인(詩人) 구보씨(丘甫氏)의 일일(一日) 1

부제 : 구보(久甫)씨(氏)가 당신에게 보내는 사신(私信) 또는 희망 만들며 살기

 

 

1

 

가을. 하고도가을어느날.

 

길을가다가자리를잘못잡아지상(地上)에서반짝이는별,그런별몇개로반짝이는황국(黃菊)이나야국(野菊)을만나면가을동안가을이게두었다가그다음국(菊)을다시별로불러별이되게하고몇개는내주머니에늘넣고다니리라.

 

내주머니가작기는하지만그곳도우주이니별이뜰자리야있습지요.딴은주머니가낡아서몇군데구멍이있는데혹지나다니는길에무슨모양을하고떨어져있거든눈꼽이며그곳이나비누로좀닦아서어디든두고안부나그렇게만전해주시기를.

 

2

 

오해하고싶더라도제발오해말아요

시인도시(詩)먹지않고밥먹고살아요

시인도시(詩)입지않고옷입고살아요

시인도돈벌기위해일도하고출근도하고돈없으면라면먹어요

오해하고싶더라도제발오해말아요

오해하고싶으면제발오해해줘요

시인도밥만먹고는못살아요

시인도마누라만으로는못살아요

구경만하고는만족못해요

그러니까시인도무슨짓을해야지요

무슨짓을하긴하는데그게좀그래요

정치는정치가들이더좋아하고

사기는사기꾼들이더좋아하고

밀수는밀수업자들이더잘하고

작당은꾼들이더잘하고

시인은시를더좋아하니까

시에미치지요밥만먹고못사니까

밥만먹고못사는이야기에미쳤지요

그래요미쳤지요허지만시인도

밥먹고살아요돈벌기위해일도하고

출근해요출근하지못하면정말곤란해요

순사가검문하면주민등록증보여야해요

순사가검문해도번호가없는시(詩)는그러니까

위법이지요위법이니까그게좀그래요

위법은또하나의법(法)이니유쾌해요그게그래요

거리를가다가혹시(詩)가있거든눈꼽이며

그곳이나비누로닦아주고안부나

그렇게만전해줘요그게그렇다구요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오규원 시인 / 시인 구보씨의 일일(一日) 2

원제 : 시인(詩人) 구보씨(丘甫氏)의 일일(一日) 2

 

 

우리들 음모(陰毛)만큼이나 어둡고 따스한 곳에

송수관을 묻고 우리가 사는 이 대지의

수도꼭지인 나무들

내장의 고름을 가을이라는 핑계로

마음놓고 누렇게

지는 잎의 형상으로 뱉아내는구나

남북(南北)이 일시에 뱉아내니

누런 고름의 통일이다 무엇보다

통일로 보는 내 눈이 아름답구나

남북(南北)과 동서통일(東西統一)로

대지의 상처는 가을이라는 이름 밑에

단정적이고 통계적으로 숨겨진다

 

낮은 데로 생각나면 임하는 녹슨

예언처럼 내상을 땅에 묻은 사람들의

고름은 요컨대 처음부터 사람을 알고

때를 알고 찾아온다, 찾아오려무나

더러워도 끝내는

사랑해도 끝내는 꿈꾸리라

따뜻한 우리들의 내상

내 몸 곳곳의 상처에도

유령마냥 찾아와 엉긴다

아름다운 것은 결국 상처가

날 수 있는 나와 너의

살아 있는 육체구나

비종교인인 내가 불러도 싸늘한 어감의

하느님, 좀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추상적이어서 제맛이 나는

하느님, 상처의 변두리에 파랗게

찬 별이 돋는데 어디 지금 하느님이 드시는

미역국은 그래도 좀 따스하기나 한지

 

청바지를 입고 나이키인지 아식스인지

신은 학생 두어 쌍과 사십대 남자와

싸가지 없게 옷을 입은 기집 한 쌍이

빈 소주병으로 구르다가 부서진다

남산(南山)의 역대 유령이 산(山)의 어둠에다

니스를 한 겹 더 칠하는 사이

소주병으로 낙하한 별 서너 개도 함께 부서지고 드디어

인간에게 위험한 숲속의 별이

어둠의 잎과 가지 사이에 태어난다

 

인간에게 위험한 별이 여기저기의

땅 위에서 번쩍인다 남산(南山)의 밑은

성(聖)하고 더러운 노동의 파란 불빛에 깜박거리는구나

가을의 폐광 천정에서 서울로

불안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녹물과

시신(屍身)의 부품을 거리는 담장 안에 숨기고

아직 돌아가는 길을 정하지 못한 나는 즐겁게

즐겁게 불안한 간격의 가지 위에

딱새의 둥지를 틀고 들어앉아

밥그릇 같은 달을 쪼고 있다

남북(南北)과 동서통합(東西統合)의 누른 내상이

엎질러진 달빛의 비폭(飛瀑)에 가 씻길 동안

결국 불안해할 수 있는

살아 있는 내 육체가 아름답구나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오규원 시인 / 시인 구보씨의 일일(一日) 3

원제 : 시인(詩人) 구보씨(丘甫氏)의 일일(一日) 3

 

 

나는 사주고 싶네 사랑하는 애인에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같은 스판텍스 브래지어, 사주고 싶네 아폴리네르 같은 팬티 스타킹, 아 소포로 한 짐 보내고 싶네 에밀리 디킨슨의 하얀 목덜미 같은 생리대 뉴후리덤

 

`황혼의 하늘을 따라

종이 평화롭게 삼종(三鍾) 기도를 올린다

망명적이며 계모 같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 풍모로서'

지저분하게 다가서는 일요일

나도 지저분하게

결코 나를 용서하지 않을 풍모로서

라포르그의 시를 베끼고

주일(主日)의 복음으로

 

골드만 같은 여의도

귄터 그라스 같은

카프카 같은

쇼핑센터에서

 

나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사주고 싶네 하이네 같은 쌍방울표 메리야스, 워즈워드 같은 일곱 색 간지러운 삼각팬티, 아 나는 등기소포로 보내고 싶네 바스카 포파의 `작은 상자'에 든 월계관표 콘돔

 

지친 뒤 늘 혼자

한 잔의 술에 취해 서쪽

하늘의 능선에다 번번이 토악질을

벌겋게 한 뒤 주저앉는 태양이여

안심하라 우리들 인간도 밥에 취해

주저앉기는 마찬가지 어떻든

쉬는 것은 일요일의 복음이고

취하는 것은 인생(人生)의 복음이고

나는 지금 쇼핑센터를 돌며

오징어 다리를 잔인하도록 유쾌하게 찢어

씹는다 가로등이

주둥이 밑으로 찝찝한

타액을 조금씩 양을 늘려

흘리기 시작할 때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오규원 시인 / 시인 구보씨의 일일(一日) 5

원제 : 시인(詩人) 구보씨(丘甫氏)의 일일(一日) 5

 

 

눈이, 하얀 눈이 온다 나는

나의 적(敵)인 내 자식들과 벽과 나의 적(敵)인 적(敵)과

눈싸움을 한다 보드라운

눈송이를 두 손으로 모아쥐면

차고 무서운 힘이 된다 눈이

하얀 눈이 오면 피가 따스하다

피가 따스할 때

내 피가 따스할 때 눈싸움을 하자

눈싸움은 아직 피가 따스할 때의 싸움

 

눈은 높은 곳에서 내려온다 눈이

내려오는 것은 하늘의 집이 이 땅의

낮은 곳에 있고 나의 적(敵)들과

내 집이 그곳에 있고

눈이 제일 먼저 가장 낮은 곳에

쌓이는 것도 아직 따스한 사랑이

낮고 더러운 우리집 근처에

젖어 있는 탓이다 눈이

하얀 눈이 온다 나는 낮은 곳에서

눈을 뭉치고 눈 오는 날만큼은

나에게도 너에게도 차고 무서운

눈덩이를 던지며 싸운다

 

눈싸움은 깨끗한 것으로 싸우는 싸움

얻어맞으면 체온이 더 따스하고

내가 피하면 얻어맞은 벽도 깨끗해진다

눈싸움은 눈덩이가 녹는 싸움 눈이

녹고 나와 적(敵)이 녹고

함께 물이 되어 숲이나

강으로 가서는 물로 흔들린다

눈이, 하얀 눈이 온다

나는 눈이 오면 적(敵)들과 눈싸움을 한다

눈이 제일 먼저 쌓이는 낮은 곳에서

이기기보다 지기 위해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지성사, 1987

 

 


 

 

오규원 시인 / 시인(詩人)들

 

 

자원(資源)전쟁시대 유류(油類)전쟁시대 그러나 걱정 마라, 우회(迂廻)전쟁시대, 이 글은 패배전쟁시대(時代)의 시 얘기가 아니니 오해마라. 시는 언제나 패배(敗北)이니 승리는 오해 마라.

시인의 나라는 높은 산(山) 골짜기에 있다.

시인의 나라는 잎이 바싹거려도 살이 바싹바싹 부서지는 골짜기에 있다. 골짜기에는

실속없는 장난

애매모호한 대화

무능한 노랫소리가 구름이 되어 산(山)허리를 졸라맨다. 그때마다 산(山)의 키가 항상 구체적으로 자란다.

 

산(山)속 골짜기에는 이상(李箱)이 병신(病身)들과 함께 누워 히히닥거린다. 늙은 여자(女子) 사이에서 릴케가, 동성연애가 랭보가 낄낄낄 웃으며 보고 있다. 도망가는 여자(女子) 앞에 꽃을 뿌리는 병신(病身) 소월(素月)을 보며 만해(萬海)가 이별을 찬미하는(이별이 아름답다는 것은 흉한 거짓말이다!) 염불을 외운다.

 

시는 추상적(的)이니 구상적(的)은 오해 마라. 시인은 병신(病身)이니 안 병신(病身)은 오해 마라. 지금 한국은 산문(散文)이다. 정치도 산문(散文) 사회도 산문(散文) 시인도 산문(散文)이다. 산문적(散文的)이기 위한 전쟁시대, 시인들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끌려가는 시인의 빛나는 제복(制服), 끌려가지 못하는 병신(病身)들만 남아 제복(制服)도 없이 아, 시를 쓴다.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문학과지성사, 1978

 

 


 

오규원(吳圭原, 1941~2007) 시인

1941년 경남 삼랑진에서 출생. 본명은 규옥(圭沃)이고,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고, 1968년 「몇 개의 현상」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으로『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오규원 시 전집』 1 ·2 등과 시선집 『한 잎의 여자』 그리고  유고시집 『두두』가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시론집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과 『현대시작법』이 있음.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2007년 65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