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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 시인 / 풀이 마르는 소리
벽지 뒤에서 밤 두시의 풀이 마르는 소리가 들린다. 건조한 가을 공기에 벽과 종이 사이의 좁은 공간을 밀착시키던 풀기 없는 풀이 마르는 소리가 들린다.
허허로와 밀착되지 않는 벽과 벽지의 공간이 부푸는 밤 두시에 보이지 않는 생활처럼 어둠이 벽지 뒤에서 소리를 내면
드높다, 이 가을 벌레소리. 후미진 여름이 빗물진 벽지를 말리고 마당에서 풀잎 하나 하나를 밟으면
싸늘한 물방울들이 겨울을 향하여 땅으로 떨어진다.
황사바람, 열화당, 1976
최동호 시인 / 해질 무렵
일몰이 오자 가로수의 그림자들이 어둠 속으로 소리없이 몰려갔다.
서늘하게 발걸음 찰랑이는 못물 위로 더디 내려오는 여름날 산그림자.
명상하는 소년이 말없이 서쪽으로 걸어갔다.
가로수 그림자들이 물속으로 사라져가자 온갖 나뭇잎들의 수런거림이 가라앉았다.
채색된 일몰 속으로 사라져간 그림자는 외롭다.
아침책상, 민음사, 1989
최동호 시인 / 홀로 걸어가는 사람
과녁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조금 비껴가는 화살처럼
마음 한가운데를 맞추지 못하고 변두리를 지나가는 바람처럼
먼 곳을 향해 여린 씨를 날리는 작은 풀꽃의 바람 같은 마음이
여자갈이 날면 백 리를 간다지만 모래가 날리면 만 리를 간다고
그리움의 눈물 마음속으로 흘리며 느릿느릿 뒷등을 보이며 걸어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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