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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삼 시인 / 노래에는 질 수밖엔요
아까부터 나는 깨어서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다가 새벽 산보나 나갈까 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세상이 즐거운 처마밑 참새들 그 잔치의 흥을 깨고 나설 엄두가 안 나네요.
어찌 참새들뿐이겠어요. 몇 걸음 더 가면 명주실을 뽑는 풀벌레들이나 혹은 그보다 훨씬 하찮은 노래꾼들의 그것도 줄줄이 잇닿아 있을 텐데요.
거기다 내 배 속에서도 문득 노랫 소리 같은 게 들리네요.
아, 나는 노래에는 질 수밖엔요.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엔요.
대관령 근처, 정음사, 1985
박재삼 시인 / 노래의 임자
잠잠하도록 소년들은 마을을 비우고 산에 와 노래하면서 그 녹음의 임자인 산새들을 쫓아 냈다. 산새들은 또한 우거진 녹음 속에서 어디론가 날아가 딴곳의 노래의 임자들을 쫓아내고 무슨 구슬방울로 노래하고 있을까. 아, 쫓아내고 노래하고, 쫓아내고는 딴 임자가 와 노래하고…… 내 마음 햇볕 찬란한 가지 끝 요새는 그 동안의 딴 노래의 임자들을 쫓아내고 명창(名唱) 임방울(林芳蔚)의 `쑥대머리'가 한자리 자리차지 하였다.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 / 노산(魯山)에 와서
소시쩍 꾸중을 들은 날은 이 바다에 빠져드는 노산(魯山)*에 와서 갈매기 끼룩대는 소리와 물비늘 반짝이는 것 돛단배 눈부신 것에 혼을 던지고 있었거든요.
이제 나를 꾸짖는 이라곤 없이 심심하게 여기 와서 풀잎에 내리는 햇빛 소나무에 감도는 바람을 이승의 제일 값진 그림으로서 잘 보아 두고, 또 골이 진 목청으로 새가 울고 가다간 벌레들이 실개천을 긋는 소리를 이승의 더할 나위 없는 가락으로서 잘 들어 두는 것밖엔 나는 다른 볼 일은 없게 되었거든요.
* 노산(魯山): 내 고향 삼천포(三千浦) 바닷가의 구릉(丘陵)
대관령 근처, 정음사, 1985
박재삼 시인 / 녹음(綠陰)의 밤에
흐느낌으로 피던 살구꽃 등속(等屬)이 또한 흐느끼며 져버린 것을 어쩌리요. 세상은 더욱 너른 채 소리내어 울고 있는 녹음(綠陰)을, 언제면 소복(蘇復) 본단 말이요. 피릿구멍같은, 옥(獄)에 내린 달빛서린 하늘까지가 이내몸에 파고들어 가쁜 명(命)줄로 야ㄹㅎ아사ㅎ는 저것을 어쩌리요. 이런 때, 천지(天地)는 입덧이 나 후덥지근하고, 태장(笞杖)끝에 피멍진 천첩(賤妾) 춘향(春香)의 전신만신(全身滿身) 캄캄한 살 위에도 병 생기는 아픔을… 만일에도 이한밤 당신이 서서 계신다면은 어느 별만 우러러 아프게 반짝인다 하리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눈물 속의 눈물
내 눈물 마른 요즈음은 눈에도 아니 비치는 갈매기야
어느 소소(小小)한 잘못으로 쫓겨난 하늘이 없던, 어린날 흘렸던, 내 눈물의 복판을 저승서나 하던 것인가, 무지개 빛을 긋던 눈부신 갈매기야, 꽃잎 속에 새 꽃잎 겹쳐 피듯이
눈물 속에 새로 또 눈물 나던 것이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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