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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재삼 시인 / 노래에는 질 수밖엔요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0.

박재삼 시인 / 노래에는 질 수밖엔요

 

 

아까부터 나는 깨어서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다가

새벽 산보나 나갈까 하고 있는데

오늘따라 세상이 즐거운 처마밑 참새들

그 잔치의 흥을 깨고

나설 엄두가 안 나네요.

 

어찌 참새들뿐이겠어요.

몇 걸음 더 가면

명주실을 뽑는 풀벌레들이나

혹은 그보다 훨씬 하찮은 노래꾼들의

그것도 줄줄이 잇닿아 있을 텐데요.

 

거기다 내 배 속에서도 문득

노랫 소리 같은 게 들리네요.

 

아, 나는 노래에는 질 수밖엔요.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엔요.

 

대관령 근처, 정음사, 1985

 

 


 

 

박재삼 시인 / 노래의 임자

 

 

잠잠하도록 소년들은 마을을 비우고 산에 와 노래하면서

그 녹음의 임자인 산새들을 쫓아 냈다.

산새들은 또한

우거진 녹음 속에서 어디론가 날아가

딴곳의 노래의 임자들을 쫓아내고

무슨 구슬방울로 노래하고 있을까.

아, 쫓아내고 노래하고,

쫓아내고는 딴 임자가 와 노래하고……

내 마음 햇볕 찬란한 가지 끝

요새는

그 동안의 딴 노래의 임자들을 쫓아내고

명창(名唱) 임방울(林芳蔚)의 `쑥대머리'가 한자리 자리차지 하였다.

 

햇빛 속에서, 문원사, 1970

 

 


 

 

박재삼 시인 / 노산(魯山)에 와서

 

 

소시쩍 꾸중을 들은 날은

이 바다에 빠져드는 노산(魯山)*에 와서

갈매기 끼룩대는 소리와

물비늘 반짝이는 것

돛단배 눈부신 것에

혼을 던지고 있었거든요.

 

이제 나를 꾸짖는 이라곤 없이

심심하게 여기 와서

풀잎에 내리는 햇빛

소나무에 감도는 바람을

이승의 제일 값진 그림으로서

잘 보아 두고,

또 골이 진 목청으로 새가 울고

가다간 벌레들이 실개천을 긋는 소리를

이승의 더할 나위 없는 가락으로서

잘 들어 두는 것밖엔

나는 다른 볼 일은 없게 되었거든요.

 

* 노산(魯山): 내 고향 삼천포(三千浦) 바닷가의 구릉(丘陵)

 

대관령 근처, 정음사, 1985

 

 


 

 

박재삼 시인 / 녹음(綠陰)의 밤에

 

 

흐느낌으로 피던 살구꽃 등속(等屬)이 또한 흐느끼며 져버린 것을 어쩌리요.

세상은 더욱 너른 채 소리내어 울고 있는 녹음(綠陰)을,

언제면 소복(蘇復) 본단 말이요.

피릿구멍같은, 옥(獄)에 내린 달빛서린 하늘까지가 이내몸에 파고들어

가쁜 명(命)줄로 야ㄹㅎ아사ㅎ는 저것을 어쩌리요.

이런 때, 천지(天地)는 입덧이 나 후덥지근하고,

태장(笞杖)끝에 피멍진 천첩(賤妾) 춘향(春香)의 전신만신(全身滿身) 캄캄한 살 위에도 병 생기는 아픔을…

만일에도 이한밤 당신이 서서 계신다면은

어느 별만 우러러 아프게 반짝인다 하리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시인 / 눈물 속의 눈물

 

 

내 눈물 마른 요즈음은

눈에도 아니 비치는 갈매기야

 

어느 소소(小小)한 잘못으로 쫓겨난

하늘이 없던, 어린날 흘렸던,

내 눈물의 복판을

저승서나 하던 것인가,

무지개 빛을 긋던 눈부신 갈매기야,

꽃잎 속에 새 꽃잎

겹쳐 피듯이

 

눈물 속에 새로 또

눈물 나던 것이네.

 

춘향이 마음, 신구문화사, 1962

 

 


 

박재삼 (朴在森. 1933년-1997년) 시인

박재삼의 유년시절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사천 앞바다의 품팔이꾼 아버지와 생선장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절대궁핍을 경험해야 했다. 어렵게 삼천포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중퇴, 1953년 〈문예〉에 시조 〈강가에서〉를 추천받은 후 1955년 〈현대문학〉에 시 〈섭리〉·〈정적〉 등이 추천되어 등단했다. 1955년부터 〈현대문학〉 등에 근무하다 1968년 고혈압으로 쓰러져 반신마비. 처녀시집 〈춘향이 마음〉 이후 〈뜨거운 달〉·〈찬란한 미지수〉·〈햇빛 속에서〉〈천년의 바람〉·〈비 듣는 가을나무〉·〈해와 달의 궤적〉·〈다시 그리움으로〉에 이르기까지 시집 15권과 수필집 〈차 한잔의 팡세〉를 냈으며, 현대문학상·한국시인협회상·노산문학상·인촌상·한국문학작가상 등을 수상했다. 1996 제4회 한국공간시인상 심사위원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