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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현종 시인 / 꿈으로 우는 거리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0.

정현종 시인 / 꿈으로 우는 거리

 

 

사람들이 말한다

사람들이 입에서 거미줄을 꺼낸다

 

그 거미줄에 걸려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눈 감은 것처럼 어두운 세상

 

……그래도

 

새들이 우는 속을 알아본다

꿈으로 우는 거리를 꿈꾼다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정현종 시인 / 나는 별아저씨

 

 

나는 별아저씨

별아 나를 삼촌이라 불러다오

별아 나는 너의 삼촌

나는 별아저씨

 

나는 바람남편

바람아 나를 서방이라고 불러다오

너와 나는 마음이 아주 잘 맞아

나는 바람남편이지

 

나는 그리고 침묵의 아들

어머니이신 침묵

언어의 하느님이신 침묵의

돔(Dome) 아래서

나는 예배한다

우리의 생(生)은 침묵

우리의 죽음은 말의 시작

 

이 천하(天下) 못된 사랑을 보아라

나는 별아저씨

바람남편이지.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나의 자연으로

 

 

더 맛있어 보이는 풀을 들고

풀을 뜯고 있는 염소를 꼬신다

그저 그놈을 만져보고 싶고

그놈의 눈을 들여다보고 싶어서.

그 살가죽의 촉감, 그 눈을 통해 나는

나의 자연으로 돌아간다.

무슨 충일(充溢)이 논둑을 넘어 흐른다.

동물들은 그렇게 한없이

나를 끌어당긴다.

저절로 끌려간다

나의 자연으로.

 

무슨 충일이 논둑을 넘어 흐른다

 

한 꽃송이, 문학과지성사, 1992

 

 


 

 

정현종 시인 / 낮술

 

 

하루여, 그대 시간의 작은 그릇이

아무리 일들로 가득 차 덜그럭거린다 해도

신성한 시간이여, 그대는 가혹하다

우리는 그대의 빈 그릇을

무엇으로든지 채워야 하느니,

우리가 죽음으로 그대를 배부르게 할 때까지

죽음이 혹은 그대를 더 배고프게 할 때까지

신성한 시간이여

간지럽고 육중한 그대의 손길.

나는 오늘 낮의 고비를 넘어가다가

낮술 마신 그 이쁜 녀석을 보았다

거울인 내 얼굴에 비친 그대 시간의 얼굴

시간이여,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그대,

낮의 꼭대기에 있는 태양처럼

비로소 낮의 꼭대기에 올라가 붉고 뜨겁게

취해서 나부끼는 그대의 얼굴은

오오 내 가슴을 메어지게 했고

내 골수의 모든 마디들을 시큰하게 했다

낮술로 붉어진

아, 새로 칠한 뼁끼처럼 빛나는 얼굴,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

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

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

 

고통의 축제, 민음사, 1974

 

 


 

 

정현종 시인 / 냉정하신 하느님께

 

 

지난 해는

참 많이도 줄어들고

많이도 잠들었습니다 하느님

심장은 줄어들고

머리는 잠들고

더 낮을 수 없는 난장이 되어

소리 없이 말 없이

행복도 줄었습니다

 

그러나 저 납작한 벌판의 찬 흙 속에

한 마디 말을 묻게 해 주세요.

뜬구름도 흐르게 하는 푸른 하늘다운

희망 한 가락은

얼어붙지 않게 해 주세요

겨울은 추울수록 화려하고

길은 멀어서 갈 만하니까요

당신도 아시지요만, 하느님.

 

나는 별아저씨, 문학과지성사, 1972

 

 


 

 

정현종 시인 / 너는 누구일까

 

 

너를 보면 취한다

피와 기대에 취하고

성적(性的) 향기에 그 아지랑이에

취하고, 참 희한한 때도 있느니

세상 걱정이 없다

너는 누구일까

 

너는 바람을 넣는다

땅과 그 위의 길들에 바람을 넣고

심장과 발바닥에

그게 헤쳐가는 시간에

바람을 넣는다

너는 넘치는 현재

너는 누구일까

 

(제도의 공인(公認)으로 무죄를 비는 거야말로 외설이지

관습에 기댄 자기기만이야말로 외설이지)

저 자연을 보렴

저 찰랑대는 방심(放心)을 보렴

INNOCENCE

너는 넘치는 현재

너는 누구일까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세계사, 1989

 

 


 

정현종(鄭玄宗, 1939 ~ ) 시인

1939년 서울시 용산구에서 출생. 1959년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 재학 시절 대학신문인 <연세춘추>에 발표한 시가 연세대 국문과 박두진 교수의 눈에 띄어 1984년 5월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음. 1965년 대학 졸업 후 같은 해 3월과 8월에 각각 「독무」와 「여름과 겨울의 노래」로 <현대문학출생>에서 3회 추천을 완료하고 문단에 등단. 1966년에는 황동규, 박이도, 김화영, 김주연, 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사계>를 결성하여 활동. 1970∼1973년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1975∼1977년에는 <중앙일보> 월간부에서 일했으며, 1977년 신문사를 퇴직한 뒤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1982년부터 연세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5년에 정년 퇴임. 1990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외 6편의 시로 '제3회 연암문학상' 수상, 1992년 「한 꽃송이」로 ‘제4회 이산문학상’을 수상. 1995년 「내 어깨 위의 호랑이」로 '제40회 현대

문학상', 1996년 「세상의 나무들」로 '제4회 대산문학상', 2001년 「견딜 수 없네」로 '제1회 미당문학상' 시 부문을 수상. 『사물의 꿈』, 『나는 별아저씨』, 『떨어져도 튀는 공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한 꽃송이』, 『세상의 나무들』, 『갈증이며 샘물인』 등의 시집과 『고통의 축제』,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이슬』 등의 시선집을 상자했다. 또한 독특한 시론과 탁월한 산문을 모은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숨과 꿈』, 『생명의 황홀』 등을 펴냈으며, 시 번역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예이츠, 네루다, 로르카의 시선집을 번역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