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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목 시인 / 탈색
색이 없는 단청 아래 오래 서 있다 색이 사라진 까닭을 스님에게 물어야할까 바람 한 겹만 벗겨도 청동물고기가 살아나고 추녀 끝 바르르 떨리며 공중이 푸른 바다가 되는 내소사 대웅보전 마당에서 나는 비린 아가미를 달고 헙, 헙,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육신의 경문을 소리 내어 읽는다 주름이며 결만을 생생하게 그려낸 꽃문살이 문에 가득 떠 있는 그곳 꽃은 어느 절정을 채색하다 황망하게 졌을 터 색은 바래어 어디로 갔는가 덜커덩 문을 닫고 뒤를 돌아다보는데 채석강 젖은 장서에 불을 지른 노을 다시는 색에 들지 않으려고 꽃무릇 곁에 씻은 붓을 세워둔 채 사그라진다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발표
이성목 시인 / 한낮의 그림자
두꺼운 구름 틈으로 복사기 불빛이 새어나온다. 한낮이 길바닥에 복사되었다.
전봇대에 올라 전기를 빨아 먹던 전깃줄도 검은 사선으로 내려앉았다.
나무는 밑동을 향해 아주 짤막하게 축소되었다.
구석구석 다 만져야 보이는 몸을 바짝 마른 종이 한 장으로 탁본하는 시각
그대가 상자에서 복사된 나를 꺼낸다. 내가 이렇게 간결하다니!
밝거나 어둡거나 선명하거나 흐린 생의 농도를 다 맞추어놓기도 전에 그대가 또 나를 읽고 간다.
몇 번을 구겨서 버린 오래된 내면이 뒤꿈치를 뚫고 뾰족하게 나온다.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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