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성목 시인 / 탈색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0.

이성목 시인 / 탈색

 

 

  색이 없는 단청 아래 오래 서 있다

  색이 사라진 까닭을 스님에게 물어야할까

  바람 한 겹만 벗겨도 청동물고기가 살아나고

  추녀 끝 바르르 떨리며 공중이 푸른 바다가 되는

  내소사 대웅보전 마당에서 나는 비린 아가미를 달고

  헙, 헙,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육신의 경문을 소리 내어 읽는다

  주름이며 결만을 생생하게 그려낸 꽃문살이 문에 가득 떠 있는 그곳

  꽃은 어느 절정을 채색하다 황망하게 졌을 터

  색은 바래어 어디로 갔는가

  덜커덩 문을 닫고 뒤를 돌아다보는데

  채석강 젖은 장서에 불을 지른 노을

  다시는 색에 들지 않으려고

  꽃무릇 곁에 씻은 붓을 세워둔 채 사그라진다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발표

 

 


 

 

이성목 시인 / 한낮의 그림자

 

 

  두꺼운 구름 틈으로 복사기 불빛이 새어나온다.

  한낮이 길바닥에 복사되었다.

 

  전봇대에 올라 전기를 빨아 먹던

  전깃줄도 검은 사선으로 내려앉았다.

 

  나무는 밑동을 향해 아주 짤막하게 축소되었다.

 

  구석구석 다 만져야 보이는 몸을

  바짝 마른 종이 한 장으로 탁본하는 시각

 

  그대가 상자에서 복사된 나를 꺼낸다.

  내가 이렇게 간결하다니!

 

  밝거나 어둡거나 선명하거나 흐린

  생의 농도를 다 맞추어놓기도 전에

  그대가 또 나를 읽고 간다.

 

  몇 번을 구겨서 버린

  오래된 내면이 뒤꿈치를 뚫고 뾰족하게 나온다.

 

웹진 『시인광장』 2008년 가을호 발표

 

 


 

이성목 시인

1962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 제주대 법학과 졸업. 1996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남자를 주겠다』(모아드림, 1999)와 『뜨거운 뿌리』(문학의전당, 2005)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