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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가림 시인 / 오랑캐꽃 6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0. 5. 10.

이가림 시인 / 오랑캐꽃  6

 

 

강물이

저문 강물이 내게 일러준다

 

일그러진 이름일랑

물거품에 실어 보내고,

서울이 가르쳐준 모든 것을

이젠 모래톱에 묻어버리라고,

 

강물이

저문 강물이 내게 일러준다

 

삐비꽃 팰 무렵 둑길에 서서

두 팔로 안아보던 만경(萬頃)벌

논 내음새

꿈엔듯 스며드는 바람을

찾아가라고, 찾아가라고

강물이

저문 강물이 내게 일러준다

 

살결에 찍힌 수없는 발자욱의

메이드 인 U.S.A.

슬픔도 땀방울도 다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불태우라고

내던져버리라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이가림 시인 / 오랑캐꽃  7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먼지의 도시로 간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창작과비평사, 1981

 

 


 

 

이가림 시인 / 오랑캐꽃 10

 

 

밤으로 빠져 나온 곳

이끌리어, 다시 이끌리어

예까지 몰래 왔다

 

범인이 현장에 다시 찾아가듯

지금 갈꽃 날리는 방죽가에 돌아와

숨어서 바라본다

엎드린 게딱지 지붕들의

촉수 낮은 불빛을

 

성큼 들어서지 못하고

문 밖에서만 엿보는 마당

퀴퀴한 청국장이라도 끓이고 있는가

어둑한 부엌에서

새어 나오는 어머니의

달그락거리는 소리

 

나는 돌아가야 한다

부서진 얼굴을 감추고

돌아가야 한다

저 번쩍이는 도시의 수렁 속으로

밤 속으로

 

순간의 거울, 창작과비평사, 1995

 

 


 

이가림 시인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남. 2살 이후부터 전주에서 살면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님.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루앙대학교대학원 불어불문학과 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빙하기」 당선. 1973년 첫시집 빙하기(민음사). 그 외 시집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창작과 비평사). 슬픈 반도(예전사). 순간의 거울(창작과 비평사). 내마음의 협궤열차(시와 시학사). 바람개비별(시학). 산문집 사랑, 삶의 다른 이름(시와 시학사). 에세이집  미술과 문학의 만남(월간미술사). 그외 역서 촛불의 미학, 물과 꿈, 꿈꿀 권리, 살라방드르가 사는 곳 등. 한국펜클럽번역문학상, 유심작품상, 편운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수상. 인하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