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광 시인 / 사랑의 발명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이영광 시집 『나무는 간다』|창비|2013
이영광 시인 / 호두나무 아래의 관찰
너거 부모 살았을 때 잘 하거라는 말은 타관을 오래 떠돈 나에게 무슨 침 뱉는 소리 같았다
나 이제 기울어진 빈 집, 정말 바람만이 잘 날 없는 산그늘에 와 생각느니 살았을 적에 잘 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무대 위에서 잠깐 어른거리는 것은 幕 뒤의 오래고 넓고 깊은 어둠에 잠기기 위한 것, 산다는 것은 호두나무가 그늘을 다섯 배로 늘리는 동안의 시간을 멍하니 앉아서 흘러가는 것
그 잠깐의 시간을 부여안고 아득히 헤매이던 잠깐의 꿈결을 두 손에 들고 산다는 것은, 苦樂을 한데 버무려 짠 단술 한 모금 같은 것 흐르던 물살이 숨 거두고 강바닥에 말라붙었을 때 사랑한다는 것은, 먼지로 흩어진 것들의 흔적 한 톨까지도 끝끝내 기억한다는 것 잘 한다는 것은 죽은 저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것,
죽은 자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깡그리 죽어 없어진 뒤에도 호두나무 그늘을 갈구리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가 바지에 똥을 묻힌 채 헛간 앞에서 쉬던 생전의 그를, 젖은 날 마당을 지나가는 두꺼비마냥 뒤따라가 그의 자리에 앉아 더불어 쉬는 것,
살아서 잘 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으랴 호두알이 떨어져 구르듯 스러진 그를 사람들은 잊었는데 나무 그늘 사라진 자리, 찬바람을 배로 밀며 눕기 위해 그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 아무도 보지 못하는데
이영광 시인 / 하느님의 미안
문일 씨는 정신지체장애 2급 동네 아재다 일곱 살들과 잘 노는 쉰일곱, 나만 보면 담배 달라고 한 지 십오 년이다 십 년쯤 전인가, 빚이며 재산 분할에 시달릴 때 식전부터 담배 줘, 하던 그에게 맡겨놨어요? 싸늘히 한마디 쏘아붙이고 나서부터는 미안해요, 담배 좀 줘요, 한다 여자를 알려줄 수도 돈을 알려줄 수도 있었는데 미안을 가르쳐주고 말았다
하느님은 유구히 상한 정신 안에 깃들어 계신다 했으니 나는 강산이 변하도록 하느님에게 사과를 받고 산다 담뱃값이 두 배가 되도록 미안이라는 폭력을 당하고 산다 흡연이 모욕인 시절에 문일 씨가 내 담배를 갑째 뺏어가면서도 미안해요, 하지 않는 날이 올까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 폐암도 과태료도 모르면서 하느님은 똑똑하고 모질기만 하신데 죄를 잊는 법도 없고 죄인을 기억하는 법도 없으신데
<포지션> 2014년 봄호
이영광 시인 / 유령 1
이것은 소름끼치는 그림자, 그림자처럼 홀쭉한 몸 유령은 도처에 있다 당신의 퇴근길 또는 귀갓길 택시가 안잡히는 종로2가에서 무교동에서 당신이 휴대폰을 쥐고 어딘가로 고함칠 때, 너무도 많은 이유 때문에 마침내 이유없이 울고 싶어질 때 그것은 당신 곁을 지나간다 희망을 아예 태워버리기 위해 폭탄주를 마시며 당신이 인사불성으로 삼차를 지나온 순간, 밤 열한시의 11월 하늘로 가볍게 흩어져버릴 수 있을것 같은 순간 당신에겐 유령의 유전자가 찍힌다, 누구나 죽기 전에 유령이 되어 어느 주름진 희망의 손에도 붙잡히지 않고 질척이는 골목과 달려드는 바퀴들을 피해 힘없이 날아갈 수 있다 그것이 있는 한 그것이 될 수 있다 저렇게도 깡마르고 작고 까만 얼굴을 한 유령이 이 첨단의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니 힘없이 증식하고 있다니 그러므로 지금은 유령과 유령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몸들의 거리 지하도로 끌려들어가는 발목들의 어둠, 젖은 포장을 덮는 좌판들의 폭소 들레를 택시를 포기한 당신이 이상하게 전후좌우로 일생을 흔들면서 떠오르기 시작할 때, 시든 폐지 더미를 리어카에 싣고 까맣게 그을린 늙은 유령은 사방에서 천천히, 문득, 당신을 통과해간다
시집 『아픈 천국』(창비, 2010) 중에서
이영광 시인 / 몸
몸은 제 몸을 껴안을 수가 없다 사랑할 수가 없다 빵처럼 부풀어도 딴 몸에게 내다 팔 수가 없다 탈수하는 세탁기처럼 덜덜덜덜덜덜덜덜덜, 떨다가 안간힘으로 조용히 멈춘다, 벗을 수가 없구나 몸은 몸속에서 지쳐 잠든다 몸은 결국 이렇게 죽는다
이영광 시인 / 공중
나의 입술의 모든 말 벚꽃이, 다 졌다
벚꽃의 하늘은 포연 자욱했더랬는데 비늘처럼 새들이 떨어져 나오는 하늘에, 비수 같은 하늘에 찬란했던 나의 말들은 이제 없다
공중이 터널처럼 둥글게 헐어 있을 뿐 내 입술의 모든 빛, 모든 노래 웃음은
타오르고 폭발하고 날아갔다
대신(代身)에 불과한 검은 가지들이 손톱마다 쓰라린 알을 배어 공중이 되기 위해 공중을 뼈 울음으로 걸으리라
― 시집 『아픈 천국』(창비, 2010)
이영광 시인 / 물푸레나무같이
당신이 한낱 사람의 몸 사람의 말로 날 죽여 나는 음 사월 물푸레나무 같이 푸르렀습니다 푸르고 튼튼하게 병났습니다 물푸레나무 곁에서 춤추는 물푸레나무같이 기쁨을 못 이겨, 나는 당신이 한없이 외로웠습니다.
당신은 한낱 사람의 말 사람의 몸을 그쳐 날 다시 살려내고, 사랑 없는 사랑이 되어 떠났습니다. 마른 가을이 살찐 여름을 단숨에 쓰러뜨리듯 나는 모든 기쁨을 힘없이 무찔러 이기고, 음 시월 물푸레나무같이 시들어 병나았습니다
이영광 시인 / 촛불
나는 나를 백만분의 일로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거대해질 수 있다
분노는 내가 묻는 것이다 슬픔은 내가 먹는 것이다 사랑은 내가 비는 것이다 싸움은 내가 받는 것이다 해방은 내가 없는 것이다
나는 타오른다 나는 일어선다 나는 물결친다 나는 나아간다
나는 모든 죽음을 삼켜버린다
- <문학과사회> 201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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