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영 시인 / 업어준다는 것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에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가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거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드는 것 같다
박서영 시인 / 식물의 눈동자
식물에게도 눈이 있다고 한다 태양을 바라보는 맑은 눈이 있다고 한다 식물의 눈동자는 뜨거운 것을 향해 환히 열린다는 것일까 태양을 똑바로 보고 걷지 못하는 얼굴을 찌푸리고 바라봐야 하는 나와는 달리 저, 말랑말랑한 부드러운 몸들은 빛의 뿌리를 끌어당겨 꽃핀다는 것일까 씨앗을 날린다는 것일까
빛이 낯설어 어둠 속에서 둥그렇게 열리는 나의 눈동자와는 달리 어둠 속에서 도리어 빛나는 짐승의 눈동자와는 달리
식물에게도 눈이 있다고 한다 아프면 눈동자에서 먼저 현기증을 느끼고 모가지가 툭 꺽어진다고 한다 그때마다 뿌리는 환한 몸살을 앓는다고 한다 짐승의 맨발처럼 온몸을 살리려고 밤새 어딘가 다녀오곤 한다고,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천년의시작 시작시인선, 2006년6월10일.
박서영 시인 / 왜가리
수면을 차고 날아가는 왜가리의 발목은 위대하다 긴 목은 허공에 잠겨 있고 발은 한없이 지상에 늘어뜨린 채
생략할 수 있는 삶을 발목만을 몇 컷의 풍경으로 남기고 갈 수 있는 왜가리의 울음은 위대하다
날아가면서 물위에도 허공에도 긴 발목을 뻗어 난蘭을 친다
날개가 부드럽게 허공을 밀고 갈 때마다 그림이 수묵水墨으로 번진다 왜가리는 툭, 터진 허공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지만 물위에는 아직 난초들이 피어 어른거린다 기다림으로 목이 길어진 서러운 저 난초들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천년의 시작 시작시인선, 2006년.
박서영 시인 / 누구의 세계입니까?
꽃나무 한 그루면 장롱도 짜고 이불도 만들고 아름답게 우는 새 한마리도 기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예단으로 저 빈 집의 목련 꽃나무 한그루면 족하지요 어떤 계절엔 미신을 믿었기에 물속의 얼굴을 보며 계속 웃는 연습을 했고 웃음이 눈물을 흘리는 걸 지켜보곤 했었지요 얼굴엔 분할된 땅들이 있는데 그중에 와잠(臥蠶)은 눈물을 숨겨 놓은 곳이지요 남루한 밥상 앞에 마주앉았을 때 당신이 많이 들여다봐서 웃다가 생긴 땅인데 나는 이제 그 땅을 밟지 못해요 사람들은 우리의 집을 폐허라고 부르더군요 나는 열심히 꽃을 피우고 풀을 키우고 아무도 못 들어오게 방문 고리를 노끈으로 묶어 놓았는데 말이지요 마루 기둥엔 온도계를 걸어두었고 빨간 눈금은 언제나 24도를 가리키고 있어요 사람들은 또 이 집을 사라진 집이라고 말해요 사라진 것들은 나의 세계입니까 당신의 세계입니까 오늘은 어떤 여자가 한 손에 커피잔을 들고 와 우리의 집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갔어요 그때 햇살이 얼마나 환하던지 나는 방안에서 찢어진 문풍지 사이로 눈동자가 쏟아지도록 그녀를 바라 보았지요
박서영 시인 / 희귀한 곤충
산길 걸어가다가 희귀한 곤충을 만났다 그 곤충에 맨발을 집어넣었다 곤충이 죽은 나무 위를 타고 오를 때 이끼들은 잠시 길을 터주었고
어릴 땐 애벌레 속에 맨발을 넣고 다녔는데 애벌레의 부드러움이 나를 키워주었는데
이젠 태풍에 쓰러진 나무나, 뿌리 잃은 나무를 타고 오른다 이상한 나무가 내 몸을 끌어당긴다 검은 세계가 내 집인 것 같아서, 좌절의 구멍을 힐끗거리는 게 내 심장의 마지막 직업인 것 같아서
그렇게 구두는 점점 희귀한 곤충이 되어간다 사슴벌레와 장수풍뎅이를 신고 외출하는 저녁이 늘어난다 숨겨놓은 맨발의 뿔들을 꼼지락거리며 흔한 풍경 속에서 사랑하기 위하여 보호색을 가졌다
희귀한 곤충은 눈에 띄기 쉬운 법 그러나 갑각류의 눈부신 광채는 드러나지 않는다 당신이 가질 수 없는 심장, 나만의 시간이 있다
갑각을 두른 곤충을 보면 구두 저 혼자 어디론가 가는 것 같다 이 저녁 출몰하는 곤충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고독과 패배로 서로에게 뿔을 들이대며 싸우다가 갑자기 두 팔을 붕붕거리더니 날아가버린다 구두 한 켤레 남겨놓고,
박서영 시인 / 여름 저녁을 기록하는 일
담벼락 밑에 웅크리고 앉은 노숙자의 발끝에서 영혼이 빠져나오지 못한다
붉은 장미꽃 그늘 아래 발끝을 모으고 앉아 있는 고양이는 공기의 도축을 이미 알아차렸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운명은 토막 난 장미의 거친 숨결 첫 번째 죽음의 매혹을 기록하는 일이다
육체와 그림자를 분리하기 위하여 바람은 한동안 끙끙거렸다 냄새와 울음이 동시에 바람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 담벼락을 스쳐 지나온 사람 기록들을 정리할 때 그곳에 두고 온 그림자에 대해 생각한다 내 그림자는 아직도 나에게 오고 있는 중이다
노숙자의 발끝에서 그림자가 태어나고 있다 발뒤꿈치엔 파문이 화석처럼 굳어진 지 오래고 그는 담벼락 밑에 앉아 햇볕을 쬐는 시체 나는 공기의 도축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그 풍경을 빠져나왔다 시체의 마음속으로 장미 꽃잎 하나가 침몰하고 있다
담벼락 위 고양이는 모든 것을 알아챈 눈빛 여름 저녁의 입구에 조등처럼 별 몇 개가 반짝반짝 나는 아직 당신을 외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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