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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종호 시인 / 공기의 꿈 · 3
누가 기다리고 있는가 세상의 길들은 불빛 속에 매몰되어 안개 아득한 날 빈 하늘에 창 하나 열어놓고 누가 날 기다리고 있는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바람의 등 뒤엔 풀잎, 풀잎의 등 뒤엔 허공, 허공의 등 뒤엔 빛의 숨결이 고요히 파도 치고 있을 뿐, 나무가 내뱉는 숨은 내가 들이마시고 내가 내뱉는 숨은 나무가 들이마신다. 허공이 내뱉는 숨은 구름이 되고 구름이 내뱉는 숨은 허공이 된다.
만나고 흩어지는 무심한 반복의 물살이여. 심장을 돌아나오는 것들은 모두가 시초에 닿아 있듯이 내 아비의 그 아비의 아비의 먼 핏줄을 접어 올라가면 홀연 목메이듯 막막한 눈발이 되는 사랑 그리고 그리움.
누가 기다리고 있는가 세상의 길들은 왼편으로 기울어 상류는 캄캄한 안개, 시린 하늘에 별 하나 걸어두고 밤새워 누가 나를 부르고 있는가.
손종호 시인 / 검객(劍客)의 노래
1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적당한 때 칼을 빼지 않는 녀석은 둘 중 하나다. 두려움에 팔목의 힘이 빠졌거나 침묵하는 고수(高手), 그러나 이제 침묵은 얼음장처럼 두꺼워져 그 깊이를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더러는 아주 일찍 담을 넘어와 내 검법(劍法)의 파일을 빼갔거나 더러는 이미 심어놓은 독버섯처럼 내 식구로 자라고 있거나,
2 몸은 영락없는 흙이었지. 흙은 정신의 거울이었구. 겁에 질린 녀석들의 시신(屍身)은 화강석처럼 단단했지만 어떤 시신들은 민들레 꽃씨처럼 가볍게 흩어져 갔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그대가 흘리는 피는 꽃잎이 아닐까. 어차피 우린 피 흘리기 위해 여기에 왔고 떠날 때면 영혼의 상처마다 고이는 체득의 기쁨, 죽음의 향기로운 열매를 거두며 돌아갈테니까. 그래도 끝까지 살아남은 녀석은 늘 마지막 출구를 잊지 않는 법.
3 불패(不敗)의 시절, 강적을 만난 적이 있었지. 그는 고요했고 닌자처럼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어. 내 칼은 그를 베었지만 그는 오동나무 위에 앉은 바람이었고 내가 쥐어든 그의 머리칼 한줌은 이미 달빛으로 변해 있었지. 나는 그때서야 알았어. 그의 사막에는 모두가 길이므로 길이 없음을. 그 눈 시린 절망의 자유를 한눈으로 보았어. 그러나 아뿔사, 나는 이미 한 마리 낙타가 되어 그의 사막 안을 걷고 있었지.
손종호 시인 / 갠지스 강의 내간문(內簡文)
--- 오직 사랑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죽으렴 사랑은 널 다시 불러낼 것이란다.
강둑 멀리 망고나무 머리 위로 푸른 소매 흔드는 바람,
뱃전에는 가르마를 타듯 흰 물살들이 흩어진다.
--- 언제든 빈손으로 노래하며 떠나렴 헤어짐은 놀라운 만남을 이룰 거란다.
어느 새 뒤 따라와 소리치는 흐린 강물 위 흰 구름 한 조각,
붉은 석양은 이미 갈대숲을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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