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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시인 / 호미
밭고랑에 쓰러진 여자는 한나절은 족히 누워 있었으나 발견되지 않았다
평생 여자가 맨 고랑이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여자의 몸은 둔덕처럼 두두룩하니 굽어져 있어 고랑에 들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평생을 닳아낸 호미가 몇 개인지 알 수 없으나 호미를 쥔 몸 어디에서부터 호미자루인지 분간이 쉽지 않았다
여자에겐 오랜 세월 밭고랑 매는 일이 방고래에 불을 들이는 일이었다 밭고랑을 훈훈하게 데워놓으면 엄나무처럼 아픈 허리도 금세 환해졌다
밭고랑이 다 식을 때까지 분리되지 않았다 여자의 몸이 호미처럼 식은 다음에야 사람들이 알아차렸다
지방도에서 빤히 보이는 밭머리에 사람들이 오가고 지도를 든 검은 승용차들이 들락거렸으나 아무도 보지 못했다
양밥이라고 했다 섣달그믐날 집안의 액을 몰아낸다고 짚으로 허재비 만들어 잘 대접하고는 액을 몰고 가라고 들판 멀리 내던지던 짚허재비 양밥처럼 버려져 있었다 목격자들은 모두 밭고랑 사이에서 호미 한 자루는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나간 사람들이 올 때까지 어스름 산그늘이 여자의 몸을 감싸안고 이슬을 가려주고 있었다
마을 남자들 경운기 트랙터 몰고 고속도로에 올라가서 절반은 돌아오지 못했던 날이었다
백무산 시인 / 길은 광야의 것이다
얼마를 헤쳐왔나 지나온 길들은 멀고 아득하다 그러나 저 아스라한 모든 길들은 무심하고 나는 한 자리에서 움직였던 것 같지가 않다
가야 할 길은 얼마나 새로우며 남은 길은 또 얼마나 설레게 할 건가 하지만 길은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나락으로 내몰았다 나에게 확신을 주었고 또 혼란의 늪으로 내던졌다
길을 안다고 나는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보았다 되돌아 서서 길의 끝이 아니라 시작된 곳을 찾았을 때 길이 아니라 길을 내려 길을 보았을 때 길은 저 거친 대지의 것이었다 나는 대지에서 달아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은 희생되었다 그러자, 한순간에 펼쳐진 바다와 같은 아, 하늘에 맞닿아 일렁이는 끝없는 광야의 그늘을 나는 보았다
우리들 삶은 그곳에서 더 이상 측향되지 않는다 우리들 꿈은 더 이상 산술이 아니다 길은 어디에나 있고 또 없다
길은 대지 위에 있으나 길은 자주 대지를 단순화한다 때로는 대지에서 자란 우리들 대지에서 추방하기도 한다 우리가 헤쳐온 길이 우릴 버리기도 한다 길은 자주 대지의 평등을 욕망의 평등으로 변질시키고 대지의 선한 의지를 권력의 사욕으로 타락시킨다
삶이란 오고 가는 것일까 인생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일까 저기 출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허공에 맞닿아 끝없이 일렁이는 물결을 보아라
길이란 길은 광야 위에 있다 길 위에 머물지도 말고 길 밖에 서지도 말라 길이란 길은 광야의 것이다 삶이란 흐르는 길 위의 흔적이 아니다 일렁이러라 허공 가운데 끝없이 일렁이어라 다시 저 광야의 끝자락에서 푸른 파도처럼 일어서는 길을 보리라
백무산 시인 / 길은 그리움으로 열린다
봄빛 바다 위에 햇살이 눈부십니다 감은사지 지나 남으로 달리는 해안도로는 내가 좋아하는 길입니다 봄빛 바다가 펼쳐지기라도 할 때면 길은 그리움으로 열려 일렁입니다
산들이 바다를 만나 멈칫 가파르게 서 있고, 길이 높아 마을 위로 짙부른 바다가 보이고 지붕 위로 배들이 지나고 파도가 길 위에 일렁입니다
길은 산을 오르다 굽이진 자리가 끊어져 보여 하늘길 오르는 듯 구름에 걸려 있습니다
생활은 물 아래 낮고 꿈은 저만큼 높이 걸어놓은 듯 길은 쉼 없이 일렁입니다
백무산 시인 / 그런 날 있다
생각이 아뜩해지는 날이 있다 노동에 지친 몸을 누이고서도 창에 달빛이 들어서인지 잠 못 들어 뒤척이노라니 이불 더듬듯이 살아온 날들 더듬노라니 달빛처럼 실체도 없이 아뜩해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언젠가 아침 해 다시 못 볼 저녁에 누워 살아온 날들 계량이라도 할 건가 대차대조라도 할 건가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삶이란 실체 없는 말잔치였던가 내 노동은 비를 피할 기왓장 하나도 못되고 말로 지은 집 흔적도 없고 삶이란 외로움에 쫓긴 나머지 자신의 빈 그림자 밟기
살았던가 내가 살긴 살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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