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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규 시인 / 제 노래에 취한 새
제 노래에 취한 새가 잠을 잔다 어둠 속에 섞인 빛을 끄집어내듯 잠 속에서도 새는 노래의 리듬을 타고 있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가 끄덕끄덕 졸면서서 추락하지 않는 건 그 리듬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지은 노래를 무수히 듣고 살아온 내게도 새처럼 저런 순간이 한 번쯤 허락될 것인가 내가 몰래 숨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누군 어둡다고 누군 쓰라린 물결이 출렁인다고 누군 상처를 뚫고 새살이 차오르는 듯하다고 중얼거리며 지나간다 내 노래에 취한 적이 없으므로 나는 내 노래에 대해 말할 게 없었다 스스로 취할 만큼의 노래를 지어 부르려면 대체 얼마만큼 깊고 맑은 페활량을 지녀야 하는 것인가 한참 후 잠에서 깬 새는 제 노래를 땅에 쏟아버리고 입다물고 날아갔다 새노래를 짓기 위하여 가슴을 부풀리려고 시퍼런 잎사귀 너풀거리는 숲으로 날아갔다
김충규 시인 / 구름의 장례식
비를 뿌리면서 시작되는 구름의 장례식,
가혹하지 않은 허공의 시간 속에서 행해지는 엄숙한, 날아가는 새들을 휙 잡아들여 깨끗이 씻어 허공의 제단에 바치는, 죽은 구름의 살을 찢어 빗줄기에 섞어 뿌리는, 그 살을 받아먹고 대숲이 웅성거리는, 살아있는 새들이 감히 날아갈 생각을 못하고 바르르 떠는, 하늘로 올라가는 칠 일 만에 죽은 아기의 영혼을 아삭아삭 씹어먹는, 산 자들은 우산 속에 갇혀 보지 못하고 죽은 자들만이 참여하는, 지상에 흥건하게 고이는 빗물에 살 냄새가 스며 있는, 그 순간 나무들의 이파리가 모두 입술로 변해서 처연하게 빗물을 삼키는, 손가락으로 빗물을 찍어 먹으면 온몸에 구름의 비늘이 돋는,
비를 그치면서 끝나는 구름의 장례식.
김충규 시인 / 구름이 울 때
지상에서 길 잃고 허둥거리는 사람을 구름은 낚아 올려 제 속에서 절인다 소금물에 배추가 절여지는 듯이 구름 속에서 사람은 흠씬 절여진다 그의 몸속에 절여진 상태로 웅크리고 있는, 그가 끌고 다녔던 무수한 길들이 밖으로 나와 빗줄기처럼 지상으로 쏟아진다 상한 만년필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잉크같이 그의 울음이 거기 섞여 떨어진다 깊은 밤 구름이 울 때 그것은 구름의 울음이 아니라 구름 속에 절여진 사람의 울음인 것 지상에서 무수한 길을 걷고도 정작 제 길을 잃어버린 사람의 가눌 수 없는 슬픔인 것 깊은 밤 구름이 울 때 고개를 올려 그 구름 쳐다보면 안 된다 구름 속에 절여진 사람의 생각들이 지상에서 올려다보는 자의 눈 속 터널을 통해 광활하게 균처럼 퍼질 것이므로 그 순간 그 자도 길을 잃고 허둥거리게 될 것이므로
김충규 시인 / 막다른 골목
막다른 골목에 불행 하나가 몰려있다 글썽거리고 있다 담을 넘으려다 제발에 걸려 넘어지는 불행 하나, 거만한 넝쿨 장미가 지켜보고 있다 햇빛도 오그라들고 마는 막다른 골목에, 낮인데도 어둠이 질척거리는 막다른 골목에, 저를 어찌할 수 없는 불행 하나가 웅크려 흐느끼고 있다 때로는 고양이의 모습이었다가 거지의 모습이었다가 미친년의 모습이었다가 등이 굽은 사십대의 가장이었다가…… 어떤 게 제 모습인지도 모르는 불행 하나가 막다른 골목에 애인을 벽에 몰아붙이고 기습키스를 하기에도 숨 막힐 듯한 막다른 골목에, 계란장수도 파지 줍는 할멈도 오지 않는 막다른 골목에 그 막다른 골목에 오늘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쩌자고! 어쩌자고!
불행하나, 어찌할 줄 모르고 막다른 골목에 갇혀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김충규 시인 / 허공이라는 묵정밭
밤의 허공에서 가느다란 기척이 느껴진다 달의 터진 실핏줄이 내시경처럼 허공을 훑으며 오는 소리, 그 실핏줄에 거무스름하게 묻어나는 어둠의 찌꺼기들, 도시라는 우울의 구근이 딸려 올라간다
내가 부르는 모든 노래는 창백했다 더 이상 상처를 캐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독백이 입속 전체를 떨림의 웅덩이로 만드는 밤,
숨넘어가듯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고 뱀이 되어 스르르 저주의 쾌도를 달려가는 기차, 이슬의 내장이 톡톡 터지는 소리,
허공이라는 허공이라는 저 묵정밭, 누군 벼락을 심고 누군 천둥을 심고 누군 태풍의 씨앗을 뿌렸겠지만 나는 다만 내 환부에서 긁어낸 살을 몰래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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