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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안영 시인 / 응시(凝視)
한 겹씩인 추운 봄이 가파른 산 능선을 잇고 가난한 집 밥상에서 수저들이 부딪히듯 깡마른 빈 가지 덧댄 움들이 다투어 필 때
목숨마다 고리지어 사슬 끌듯 아린 시간 왼쪽 날개 부러져 검불 속에 숨어든 새 울음이 봄 숲에, 마음에 칼금을 긋는다
거울이 거울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명약(名藥)이라는 시간은 점점 더 어두워져 저 울음 그치기 전에 나는 가지 못한다
선안영 시인 / 제5 마네킹
불 켜진 환한 길들 리본으로 묶이고
흘린 밥알 다시 주워 입에 가져가 듯 맘은 있다 맘은 없고 찬 손만 남아서 뒤돌아 볼 수 없어, 주먹도 쥘 수 없어
관절을 다 꺾고 접어 비명을 꽃 피운다
선안영 시인 / 야광별이 빛나는 밤에
햇볕을 밚이 봐야 더 오래 반짝인다
별빛의 모서리에 별이 하나 발을 걸치고
한 번도 빛난 적이 없는 별, 내 옆에 또 네가 있다
선안영 시인 / 나팔꽃씨
살아서 이토록 멀리 한 음을 찾아 가네
불 켜진 너의 창가 눈앞이 흐려지고 모가 닿은 까만 시를 언 땅에 꽝꽝 묻어 키워온 눈덩이 같은 한 마디도 마저 묻어 첩첨히 닫혔던 문과 창들 열리면
마약의 밑바닥에서 무정을 건져오겠네
선안영 시인 / 불루를 찾아서
다음 정유장에서 내릴 게요. 이제 더는 혼자 못 가 둥그런 어느 해안에 내 한 몸 던져야만 주름 집 그 안에 피신한 굳은 혀가 풀리는
오만삭신 병들로, 가짜들로 숨 막힐 때 하늘을, 바다를, 긴 절벽을 그릴 때면 던진 돌 떨어지는 선으로 스치며 날아갔지요
내 자리를 삯전으로 파랑에게 맡기려는데 꿈을 가려버려 눈동자를 둘 데가 있나요. 남겨진 한 방울을 더 짜내려 너의 목을 조르고픈
선안영 시인 / 무월마을 외딴 집
끈 떨어진 연을 밤마다 주우러 가는 미풍이 섞여 오면 혼자 울기 더 좋은 녹 슬은 함석지붕 아래에서 빗줄기를 바라본다
하루를 꼬박 굶고 냅킨 위에 쓰는 편지 달도 없는 어둠 속에 무수한 빗금들 이생은 글렀다 다 틀렸다 비문처럼 새겨지는
징징징 귀가 울어 더 먼 데로 가고프나 움푹 꺼진 베개를 토닥이다 눈 감으면 간절히 누가 부르는가 발뒤꿈치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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