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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선안영 시인 / 응시(凝視)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4.

선안영 시인 / 응시(凝視)

 

 

한 겹씩인 추운 봄이 가파른 산 능선을 잇고

가난한 집 밥상에서 수저들이 부딪히듯

깡마른 빈 가지 덧댄

움들이 다투어 필 때

 

목숨마다 고리지어 사슬 끌듯 아린 시간

왼쪽 날개 부러져 검불 속에 숨어든 새

울음이 봄 숲에, 마음에

칼금을 긋는다

 

거울이 거울을 어루만질 수 있을까?

명약(名藥)이라는 시간은 점점 더 어두워져

저 울음 그치기 전에

나는 가지 못한다

 

 


 

 

선안영 시인 / 제5 마네킹

 

 

불 켜진 환한 길들 리본으로 묶이고

 

흘린 밥알 다시 주워 입에 가져가 듯 맘은 있다 맘은 없고

찬 손만 남아서 뒤돌아 볼 수 없어, 주먹도 쥘 수 없어

 

관절을 다 꺾고 접어 비명을 꽃 피운다

 

 


 

 

선안영 시인 / 야광별이 빛나는 밤에

 

 

햇볕을 밚이 봐야 더 오래 반짝인다

 

별빛의 모서리에 별이 하나 발을 걸치고

 

한 번도 빛난 적이 없는 별, 내 옆에 또 네가 있다

 

 


 

 

선안영 시인 / 나팔꽃씨

 

 

살아서 이토록 멀리

한 음을 찾아 가네

 

불 켜진 너의 창가 눈앞이 흐려지고

모가 닿은 까만 시를 언 땅에 꽝꽝 묻어

키워온 눈덩이 같은 한 마디도 마저 묻어

첩첨히 닫혔던 문과 창들 열리면

 

마약의 밑바닥에서

무정을 건져오겠네

 

 


 

 

선안영 시인 / 불루를 찾아서

 

 

다음 정유장에서 내릴 게요. 이제 더는 혼자 못 가 둥그런

어느 해안에 내 한 몸 던져야만 주름 집 그 안에 피신한

굳은 혀가 풀리는

 

 오만삭신 병들로, 가짜들로 숨 막힐 때

 하늘을, 바다를, 긴 절벽을 그릴 때면

 던진 돌 떨어지는 선으로 스치며 날아갔지요

 

내 자리를 삯전으로 파랑에게 맡기려는데 꿈을 가려버려

눈동자를 둘 데가 있나요. 남겨진 한 방울을 더 짜내려

너의 목을 조르고픈

 

 


 

 

선안영 시인 / 무월마을 외딴 집

 

 

끈 떨어진 연을 밤마다 주우러 가는

미풍이 섞여 오면 혼자 울기 더 좋은

녹 슬은 함석지붕 아래에서

빗줄기를 바라본다

 

하루를 꼬박 굶고 냅킨 위에 쓰는 편지

달도 없는 어둠 속에 무수한 빗금들

이생은 글렀다 다 틀렸다

비문처럼 새겨지는

 

징징징 귀가 울어 더 먼 데로 가고프나

움푹 꺼진 베개를 토닥이다 눈 감으면

간절히 누가 부르는가

발뒤꿈치가 들린다

 

 


 

선안영 시인

1966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했다.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으며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등단. 시집으로 『초록몽유』(고요아침, 2008)이 있다. 제7회 전국 금호시조 대상을 수상. 2008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 2009년 무등시조문학상 수상. 2011년 서울문화재단 문학 창작기금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