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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석미화 시인 / 왕오천축국전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8. 14.

석미화 시인 / 왕오천축국전

 

 

당신의 서신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장안에 파다했습니다 천년이 더 걸려 편지가 도착하고 이 나라엔 자꾸만 눈이 휘몰아쳤습니다 천년을 돌아온 길, 또 천년이 흐를까 봐, 나는 천안의 거처에서 새벽 눈을 뚫고 올라갔습니다 천안에서 안서*까지의 거리가 꿈결인 듯 펼쳐진 능선은 끝도 시작도 없었습니다

 

눈들의 집결지 안서는 당신이 도달한 곳 잠들지 않는 눈, 천수천안은 내가 이를 곳입니다 당신 눈 속의 천산은 두려움을 모르고 나의 눈물 속 물음은 적요를 모른 채

 

당신의 전갈은 밤새 쌓이고 쌓였지요 눈은 거침없고 사방 흰 두루마리를 미리 펴주었습니다 몰아치는 눈발을 안섶에 여미고 가는 행적, 손을 뻗어 쓰다듬으면 되돌아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서역, 당신이 보았던 산마루 바라듯 그 남은 하루를 돌아들면

 

또박또박 쓴 정자체를, 긴 밤 소사나무 위에 내린 눈발의 획들을, 행간마다 내려앉는 장신의 숨소리를, 그 나머진 못다 읽은 멀고 먼 폭설이었습니다

 

안서(安西)에서 서안(西安)으로 흘러든 족적,

어디서부터 어디에 이르렀다는 안서(雁書)의 시편들은 천안(天眼)을 휘돌고

마지막 순례지를 지워버린 이국의 눈밭 당신이 찾은 한 구절은 무엇이었나요

 

이제 어디로 갈까요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그를 못봤나요 아무도 없었어요 저녁 눈 속으로 들어갔나요 저기 어딘가 흰 산이 우는 소리 따라갔나요

 

* 開元十五年十一月上旬 至安西 : 개원 12년 11월 상순에 안서에 이르렀다.

 

석미화,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 ,여우난족골, 2021년, 40~41쪽

 

 


 

 

석미화 시인 / 걸어가는 여인

- 자코메티의 조각을 보고

 

 

물컵을 바라보는 일이

여백 바깥으로 걸어갑니다

 

손을 대지 않아도 넘어지는 물컵

오늘은 이것만을 생각합니다

 

오후 여섯 시가 되면

길쭉한 물컵

 

그날도 이랬을까

몸통과 다리만 남은 여인을 생각합니다

 

물컵은 무언가를 담았고 수없이 흘려보냈습니다

 

어쩌면 귀울음이거나 기울어지는 세계

 

나는 거기 없고

너도 거기 없는

어느 눈앞이었습니다

 

물컵에 맺힌 물방울

물컵에 비친 위장약

물컵에 쏟아지는

 

오래 붙들려 있는

일을 생각합니다

 

저녁이 되자 물컵을 멀리 두었습니다

 

여백 바깥으로 여인이 걸어갑니다

 

 


 

석미화 시인

1969년 경북 성주에서 출생. 2010년 계명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졸업.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4년《시인수첩》 신인상 당선. 시집<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