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정우의 인연의 향기] ‘오죽하면’이란 마음으로 길정우 베드로(전 국회의원, 전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 공동대표) 가톨릭평화신문 2021.05.23 발행 [1614호]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의 박명규 교수가 정년퇴임을 했다. 은퇴를 앞둔 교수들이 여러 방식으로 지난 세월을 정리하곤 하지만 박 교수는 과거의 인연을 묵향(墨香)에 담아 서예전을 기획했다. 대학동문인 그는 오랫동안 연마한 서예 솜씨로 제자들에게 써준 글들을 한데 모았다. 기획전의 제목은 이문회우(以文會友). 논어에 나오는 글인데 “군자는 학문이나 글로써 벗을 사귄다”는 뜻이다. 인용한 글의 뒷부분은 이우보인(以友輔仁)으로 “그 벗이 있음으로써 서로의 인덕을 닦는다”는 말이다. 살아가면서 좋은 인연을 만나면 서로 간에 덕을 쌓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박 교수 자신도 서예전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이들의 남다른 재능과 독특한 삶이 나의 인생 여정을 다채롭게 만들어 주는 선물임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와 생각이 같지 않은 이들과의 만남이나 대화가 기쁨보다는 부담이다. 나와 다른 종교, 다른 이념을 갖고 소속한 정당도 상이한 이들과 허물없이 대화하며 함께 지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다르다는 것이 불편함이 아니라 보람이고 풍요로움으로 다가오기까진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지역 국회의원으로서 현실정치를 체험한 나에겐 매우 힘든 과제였다. 게다가 내 편과 네 편을 가르며 승리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 정치의 생리라고 배운 정치학도로선 하루하루가 긴장과 경계심의 연속이었다.
정치에 입문하며 가톨릭 평신도공동체 마리아사업회(포콜라레)의 창설자인 이탈리아의 끼아라 루빅(1920∼2008)이 25년 전 시작한 ‘일치를 위한 정치운동(MPPU)’에 참여했다.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소명이었지만 깨달음이 있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의 대화와 만남이 정치의 초심을 잃지 않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일치를 향하는 길이라고 스스로 정리했다. 그리고 의견이 부딪히는 경우마다 “오죽하면”이란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마리아사업회가 추구하는 일치 역시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한 바탕 위에서 추구하는 만큼 나와 네가 모든 면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지향하는 건 아닌 듯싶었다. 그래서 이탈리아어로 ‘일치’란 오히려 우리 말로는 ‘조화’에 가까운 뜻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치든 조화든 우리 모두가 원하는 존엄성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책이다. 인간에게 내려준 하느님의 선물이 존엄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구나 스스로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택의 순간은 내가 다른 이들과 마주칠 때마다 수시로 다가온다. 이때 우리는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혹은 “내가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앞서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라는 생각으로 접근할 때 상대와의 원만한 동행을 위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자아 성찰이나 자기 존엄성을 찾는 노력이 어렵사리 만들어진 인연을 소중하게 가꾸어 가는 방법이란 뜻이다. 불편한 만남 때마다 “무슨 사연이 있겠지”라든가 “오죽하면”이란 마음가짐으로 상대방과 공감하려는 자세가 자기 성찰보다 쉬운 방도일 수 있다.
살다 보면 나쁜 인연에 엮이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어떤 인연이든 이를 현명하게 그리고 소중하게 관리하는 노력은 존엄성 있는 나의 삶을 위한 길이다. “글로써 벗을 사귄다”는 친구의 은퇴 서예전은 인연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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