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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가톨릭 산책

[슬기로운 성당 이야기] (9)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상)

by 파스칼바이런 2021. 6. 1.

[슬기로운 성당 이야기] (9)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 (상)

영화 ‘로마의 휴일’로 유명해진, 1200여 년 역사 간직한 성당

가톨릭평화신문 2021.05.30 발행 [1615호]

 

 

 

 

영화 ‘로마의 휴일’의 그곳

 

전 세계 관광객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 바로 이 성당 입구다. 사진 한 장 찍으려고 긴 시간 줄을 서야 하는데도 그 누구도 마다치 않는다. 또한, 순례객들에게는 이 성당의 이름이 낯설다. 코스메딘의 성모마리아 성당을 순례한다고 하면 거기 왜 가느냐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들을 마주할 때가 많았었다. 그럴 때마다 “진실의 입에 가는 겁니다”라고 말을 바꾸어야만 했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사진 찍고 되돌아가기 바쁘지만, 그들이 서 있는 이곳이 수천 년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대부분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먼 곳 이탈리아 로마까지 와서 이 엄청난 역사의 현장 속에서 손만 넣고 돌아간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조금만 더 관심을 기울여 성당 곳곳을 들여다보면 굉장한 역사의 흔적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상업지구에 있는 성당

 

이 성당과 관련된 최초의 역사는 고대 로마로부터 시작된다. 포룸 보아리움(Forum Boarium)과 포룸 올리토리움(Forum Holitorium)이라고 불리는 포룸 두 곳이 만나는 지역이었다. 포로 로마노라고 불리는 로마 포룸은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고, 이곳은 가축시장과 채소와 과일 시장이었던 곳으로 상업지구였다. 이 두 곳의 포룸이 이곳에 형성된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도 성당을 나와 길을 건너면 로마의 젖줄이라고 불리는 테베레 강이 있다. 이 강을 통해서 배를 이용하여 가축들과 채소들을 로마 시내로 운반하기 수월했기 때문이다. 또 이 근처에 시작되는 아우렐리우스 가도와 가까우므로 내륙으로 운반할 수도 있었다. 이 두 개의 포룸 터가 현재 성당 지하의 일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성당 앞 광장이 바로 이 포룸의 중심지였다. 또한, 이 포룸에서 최초의 검투사 경기가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기원전 264년)

 

이 포룸에서 이어지게 되는 곳은 헤라클레스 신전이 있었던 곳인데, 이 신전을 ‘아라 막시마(Ara Maxima, 최고의 제단)’라 불렀고, 현재 성당의 뒷길 이름을 ‘무적 헤라클레스의 아라 마시마(Via dell‘Ara Massima di Ercole Invitto)’라고 하며 이곳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최초의 신전은 기원전 753~509년이라고 전해지지만 그 후 기원전 142년 로마의 유명한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스키피오 아밀리아누스에 의해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 내용 또한 성당 지하에 있는 명판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지하실 정문과 지하 계단에서 이어지는 복도 등에서 헤라클레스의 아라 마시마 터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아라 마시마에서 바로 이어지는 건축물은 ‘스타티오 아노내(Statio Annonae)’라고 불렸던 고대 로마 시대 관청 중 하나이다. 이곳은 빈민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고 관리했던 관청인데 여기에는 그 관청의 사무실이 있었다. 이 사무실 터는 현재 성당 내부 측벽들에 사용한 매몰된 기둥들을 통해 그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고대 로마 두 곳의 포룸과 헤라클레스 신전과 로마 관청의 사무실이었던 곳이 이 성당의 터가 된다.

 

성화상 논쟁 시대에 이주해온 ‘그리스 공동체’를 위한 성당

 

이런 모습으로 7세기 후반까지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종종 6세기 후반 당시 성 그레고리오 1세 대교황(재위 590~604)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을 것이라는 의견도 지금까지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성당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하드리아누스 1세 교황(재위 772~795) 때라고 보고 있다. 그 후 815~84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성화상 파괴의 박해를 피해 온 수도자들에게 이 공간이 허락된다. 이때부터 이곳의 명칭은 ‘그리스 교회(Ecclesia Grecorum)’ 또는 ‘그리스 공동체(Schola Graeca)’라고 불렸다. 오늘날 성당 옆길의 이름이 ‘그리스의 길(Via della Greca)’인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현재 이 성당의 이름인 ‘코스메딘(Cosmedin)’이라는 단어도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다. 이 이름에 대한 유래도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수도원 이름인 코스미디온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성당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는 뜻으로 아름다운, 우아한 등의 그리스어 ‘코스미디온(kosmidion)’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그들에 의해 동방의 이콘이 서방 교회 즉, 로마 교회에 들어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로마네스크로 재건된 성당

 

그 후 1084년 노르만의 침공으로 인한 파괴로 1123년 성당의 대대적인 복원과 확장이 이루어진다. 갈리스토 2세 교황(재위 1119~1124)에 의해 진행되는데,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과 성당 내부의 성가대석이 추가되며, 또한 이 성당을 유명하게 만든 바닥 장식이 만들어진다. 이 바닥 장식을 ‘코스마테스크(Cosmatesque)’라 부르는데, 모자이크 예술의 명가였던 코스마티 가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장식은 12~13세기에 크게 유행했는데 로마,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 중세 성당들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로마에는 이 코스마테스크 장식으로 유명한 성당들도 많지만 대부분 화재나 파손으로 인해 복원된 바닥 장식들이다. 하지만 이 성당의 코스마테스크 바닥 장식은 20세기에 복원을 한 부분들도 있지만 대체로 원본을 유지하고 있다. 성당 내부를 걷기만 해도 900여 년의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 후 수 세기 동안 복원이 진행되고 장식들이 추가되는데, 17세기에는 바로크의 영향으로 성당의 정면이 바로크 양식으로 재장식되었고, 이때 그 유명한 맨홀 뚜껑인 ‘진실의 입’이 성당 현관에 놓이게 된다. 지금은 17세기 판화로만 확인할 수 있을 만큼 바로크 양식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필자 또한 그 판화를 보는 순간 너무 엉뚱하고 이 성당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엉뚱한 모습은 100여 년이 지나 1894~1899년 조반니 바티스타 조베날레(Giovanni Battista Giovenale)에 의해 중세의 모습으로 재복원되었고, 그 중세의 모습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 복원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로마 포룸과 콜로세움에서 고대 로마 시대의 석재들을 옮겨와 성당을 복원하면서 또 다른 유적의 파괴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성당 내부에는 총 22개의 기둥이 있는데 이 기둥들의 일부가 그때 가져온 기둥들이다.

 

다음에는 성당의 입구에 있는 ‘진실의 입’에서부터 내부의 공간에 대한 역사와 의미를 알아보려 한다.

 

윤종식 신부(가톨릭대학교 전례학 교수) / 박원희(사라, 이탈리아 공인 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