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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윤주 시인 / 아버지의 목소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4.

배윤주 시인 / 아버지의 목소리

 

 

아버지가 보고플 때는

노을이 진다.

그림자 길게 키를 키우면

어디선가 뚜벅뚜벅 걸어오실 것 같아.

 

죽음을 잊고 사는 영혼처럼

욕심의 주먹으로 움켜쥔 어깨가 아파오면

욱신욱신 통증 따라 울려오는

아버지목소리

"영원한 것은 없나니 벗어두고 갈 짐 가볍게 가거라."

 

두려움을 모르고 뛰어내리는 폭포처럼

좌절의 의자에 앉아있으면

아버지는 툭툭 어깨를 치신다.

"내려갈 일보다 올라갈 일이 더 많단다."

아버지는 쿵쿵 노크를 하신다.

"울어 본 사람이 웃을 줄 안단다."

 

삶의 과속 악셀을 밟을 때

끼이익 ......!

들려오는 아버지 목소리

"사랑한다, 내 딸아."

 

 


 

 

배윤주 시인 / 엄마의 방

 

 

오랜만에 홀로 사시는 엄마 집에 왔다.

문을 열면 환하게 피는 함박 꽃웃음의 엄마 얼굴

깊은 산골 소녀 같은 기쁨이 나를 부둥켜안고

급히 달려나온 젖은 두 손이 투덕투덕 나의 등을 다독인다.

'아가, 오느라고 수고 했구나.'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의 방에 앉으면

한상 가득 엄마의 일상 이야기가 소복이 안겨온다.

머리맡에 작은 손거울. 향내 나는 분통. 색 바랜 전화기. 모서리가 일어선 손수첩. 손때 묻은 몽당연필......

엄마의 방은 거친 외로움의 박물관

오롯이 함께 모여서 엄마와 살고 있구나.

 

그리고 방 한가운데 오랜 세월을 달려온 듯 걸려있는 달력

흐려진 시력만큼 노안의 숫자가 확대되어 펼쳐진 일정

오늘 날짜에 서툴지만 진하고 크게 그려진 빨간 동그라미

어깨너머 혼자 배운 엄마의 한글솜씨가 눈에 낯익다.

 

정성의 힘이 빡빡히 들어간 삐뚤한 글씨 '내 딸 윤주 오는 날’

엄마는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 그리며

나와 함께 살고 있었구나.

 

 


 

 

배윤주 시인 / 감기유감

 

 

누운 듯 기대어 선 나른함

조금씩 묵지근해 지는 앞머리의 감각에 낯익은 이름이 치근댄다.

주황빛 구름띠처럼 가느다란 황홀함마저 눈꺼풀에 얹어진다.

전신을 엄습하는 느린 몸의 대화

나약한 고귀함으로 사치스러운 휴식이 저녁노을처럼 깊어진다.

눈꺼풀이 쇠약해지면서 시간처럼 다가오는 확신, 감기다!

 

창가 너머 엊그저께 옮겨 심은 고무 나뭇잎 몇 개가 노랗다.

 

일상의 브레이크처럼 가끔씩 걸리곤 하는 병,

설사 심하게  앓는다 해도 죽음에 이르지는 않으리라는

무모한 믿음에 푸욱 자학할 수 있는 이별 같은 병

푸욱 앓고 나면 잊어버리는 사랑 같은 병

 

병들어가고 있음의 자각에

눈으로 서서히 올라오는 열감은 자아의 분출

한때 지나가면 그 뿐일 거라는 실낱같은 쾌감과 예감이 얽혀 퍼지는 열기

삶의 궤도에서 발생된 오류를 뱉어내듯 튀어나오는 기침

조용히 육체로 여리게 침잠하는 통증

누군가의 숨을 거쳐 온 너와의 공생을 받아들이며 순응한다.

착한 긍정으로 부득불 주어지는 강제적 휴식에 오히려 깨어나는 상념의 물결

 

새로 심은 고무나무도 몸살을 앓고 나면 새벽 창문의 새잎을 낼 것이다.

 

가끔은 연민의 대상이고 싶은 내 삶에

절규하는 저항으로 눕고 싶다.

 

 


 

 

배윤주 시인 / 선풍기

 

 

저 구석에 뒤돌아서서 혼자 울먹이듯

돌아앉은 선풍기를 발견했다.

 

힘겹게 너를 안아서 되돌려 앉혀놓고

곱게 빗어 넘긴 철망의 틈 사이로 내려앉은

서러움의 먼지를 한 꺼풀씩 걷어낸다.

무더위 속에 오롯이 마주보던 선풍기

소리조차 죽이고 멈추어 서 있다.

죽을 듯이 뜨거웠던 시절 열망했던 가슴속에 불던 열풍

그 사랑도 사진처럼 정지된 가슴으로 기억 속에 있다.

 

한때는

너 없이 못 살겠다고

너를 끌어안고

너와 얼굴을 맞대고

하루 종일 네 앞에 마주 서있기만을 바랬지.

사랑하던 그 사람도 그렇게 말했지.

 

이제

다 식어버린 바람을 정이라 에리며

이 다음에 다시 보자 한다.

그 사람 그 사랑도 이 다음에 뜨겁게 다시 보고 싶다.

 

 


 

 

배윤주 시인 / 눈의 기도

 

 

모든 소리를 들으며 눈이 내린다.

눈은 모든 소리를 더듬으며 기도한다.

 

눈이 없어도 더듬으며,

더듬으며 내리는 눈은

누군가의 마음을 익숙하게 녹여내려는 것

차마 못 건낸 몇 푼의 이야기마저 거미줄같은 인연에 걸려도

눈은 세상을 더듬으며 녹여 내린다.

 

눈 내리는 막차에 웃는 이 늦게까지 없어도

마주할 가족들의 미소에 한 고개 남은 길도 짧다.

 

어둠의 속눈썹이 감기도록 세상을 더듬으며 여물게 내리는 눈은

거대하고 하얀 무명이불처럼 쌓이고

막차는 멈출 것을 예상하면서 자꾸 달린다.

막차에서 내리는 것은 투정에 지친 발

발바닥을 간지르며 번져가는 피로에

더욱 하얗게 피어나는 눈의 기도

가장 먼저 태어나서

가장 먼저 잠 드는 자, 눈을 뜨게 하소서.

눈 시린 이들의 서러운 이야기, 해 밑으로 소복하게 하소서.

오래전 붉었던 동백이 온 생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이제 푸른 꽃받침마저 시름을 잊은 하얀 빛이 되게 하소서.

 

바람에 시달리던 모퉁이에

몰려 앉은 눈의 기도가 하얗게 밤을 더듬는다.

눈 어두운 자의 눈이 되어 귀를 대고 침묵의 손길로 듣는다.

막차는 떠날 것을 약속하며 자리에 들듯이

기도는 온 생의 이야기를 익숙하게 더듬으며 눈이 되어 내린다.

한 알의 기도마저 분주히 휘날리는 침묵으로 세상을 보듬게 하소서.

 

 


 

배윤주 시인

충북 영동에서 출생. 경인교육대학 졸업. 2019년《시와 경계》를 통해 등단. 한국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