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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동호 시인 / 세탁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1. 11. 24.

이동호 시인 / 세탁기

 

 

아내가 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려 한다

아내의 완력에 빨래처럼 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무소불위한 잔소리의 권능에 못 이겨

끝내 구겨져 세탁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탁기 속에도 사계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세탁기가 지구처럼 자전한다

몸이 바닥의 회전 날을 축으로 공전하는 동안

내 몸통 속에서 아름답게 꽃이 피고 지고

졸졸 시냇물이 흐르고

물거품이 해조처럼 밀려들 적마다

내 속으로 신호가 밀려와서 자라고

머리에서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울리곤 했다

내 몸의 각질이 낙엽처럼 내 주변을 떠돌았다

시베리아 벌판을 고사목처럼 걸어다니기도 했다

아내가 원하는 내 부활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젖은 아내의 명상 속을

섬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곧 탈수될 것이다

햇볕 소용돌이치는 어느 베란다에서

말 잘 듣는 강아지풀처럼 뽀송뽀송

잘 건조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동호 시집 <조용한 가족>, 문학의전당, 2007.

 

 


 

 

이동호 시인 / 장마에 갇히다

 

 

창가에 서서 비의 창살을 두 손으로 잡고 흔든다

방은 감방이었고 나는 수감 중이다

언제부터 빗소리에 취조 당하고 있었던가

나도 모르게 기밀들을 발설하지는 않았는지

비는 더 알아야할 것이 있다는 듯 그치지 않고

더 젖을 것도 없는 나는 창가에 서서 불안하다

빗소리에 젖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는 있는가

호출신호처럼 천둥이 울리면 각오할 수밖에 없다

남은 것은 전기 의자뿐이라는 듯

하늘은 연신 전원을 올리고 있다

탈출을 감행했던 사람들은 모두 독방수감중이다

우산 속에 갇힌 사람의 뒷모습과

이역의 대문 앞에서나 처마 밑에서

홀로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그래서 쓸쓸하다

비의 제국주의도 이쯤 되면 폭동이 있을 법한데

잠잠하다 비의 강점기, 비의 탄압은 완벽하기에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창가에 불빛이 아른거린다

불빛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고 몰래 타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기도하는 모습이 되어

창가에서 타올랐지만

여전히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

비는 한층 더 큰 소리로 어디론가

모르스 신호를 타전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고 나는

비의 창살이라도 끊을 것처럼

날카롭게 서 있다

 

 


 

 

이동호 시인 / 한 밤 중의 창세기

 

 

방안에는 아내의 배가 노아의 방주처럼 정박해 있다.

아내의 부푼 배가 자꾸만 들썩이는 이유를

방주 속 삼백 예순 다섯 종의

날짐승과 길짐승 때문이라고 해석하면서부터

나는 밤마다 잠을 설쳤다.

아내는 자꾸만 맹수처럼 코를 골았고

전원을 꺼놓지 않은 TV는 한밤 내 비를 쏟았다.

창 밖은 지금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

네온사인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술집의 타락한 형광등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소주잔을 기울였다.

불연 지붕 위에 신의 사자처럼 먹구름이 몰려왔다.

모든 지붕 위로 심판의 빗줄기가 그어졌다.

땅 위로 무수한 방언들이 쏟아졌을 때,

아내의 배가 서서히 노 젓기 시작했다.

나는 약속된 아침을 찾아 동승한 비둘기,

아내의 배가 가 닿아야할 아라라트 산은

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아직도 내겐 한 장의 푸른 감람나무 잎조차 제공되지 않았다.

문득 뱃속에 새 생명을 싣고 잠든 아내의 얼굴이

성경 속 말씀처럼 편안하게 보였다.

잠든 아내의 얼굴에서 감람나무 이파리처럼

맑은 한 장의 웃음을 찾았다.

나는 잠든 아내의 배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아내의 부풀어 오른 방주가 내 품에

포근히 정박해 왔다. 

 

 


 

 

이동호 시인 / 콩나물국, 끓이기

 

 

사내는 뚝배기 속으로

지휘봉을 가져간다

도에서 끓기 시작한 뚝배기 속의 음표들을

사내는 지휘하듯 휘휘 내젓는다

음계는 금세 높은음자리로 음역을 높인다

이 음악은 너무 뜨거워 맛보기가 힘들다

사내는 입술을 오므려 솔,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이 뚝배기 속으로 뛰어든다

음악소리가 완전히 익기까지는

시간을 조금 더 끓여야한다

사내는 잠시 식욕을 닫고

기다리는 동안 창 밖을 바라본다

창 밖 나뭇가지가 세상을 휘젓는다

공중 부양하는 수많은 손바닥들

손대기에도 너무 뜨거운 세상 때문이다

땅의 뚝배기 속에 떨어지기도 전에

나뭇잎이 몸을 굴린다

사내가 삶의 안쪽으로 몸을 돌린다

뚝배기가 심장처럼 펄펄 끓어오른다

뚝배기를 식탁 쪽으로 옮긴다

사내는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에 숟가락을 끼운다

뜨겁게 김이 오르는 음표들을 입으로 분다

음표들이 낮은 음계에 도달한다

뒷모습이 콩나물인 사내가

음악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는다

한 소절의 생이 고스란히 입안에서 씹힌다

창 밖 저녁노을이,

얼큰하다

 

 


 

 

이동호 시인 / 폐가廢家

 

 

감나무 가지에 홍시처럼 매달려 있는 그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우체부였다

감나무에는 우표가 무성했으므로 그의 혼은

무사히 하늘로 잘 배달되었으리라

감나무는 그의 육신을 양분으로 더욱 붉었지만

곧 지상으로 힘없이 난무했다

그에 대한 억척의 소문들도 모두 붉어갔다

경찰은 경찰답게 그의 주검에 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으로 귀납 추리했고

마을은 이웃답게 주검에 대한 연민을

혀 밑에 묻었다 담벼락 밖으로

뚝뚝 떨어진 소문일수록 바람에 실려가

산을 붉게 물들였다

철새들이 날아올라 서녘하늘에

단풍잎을 하나 둘 떨어뜨리고 지나갔다

집은 끝내 함구했다

그가 가꾸다만 황폐해진 가을 속으로

참새들이 하나둘 몰려들어 혀를 찼다

바람이 그가 매달려있던 가지를 세차게 흔들어놓았다

그가 신고 다닌 마당의 발자국 속으로

밤새 서리 내리고,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이

잡초 속에서 마지막으로 꼼지락거리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해 겨울

답장처럼 눈이 내렸고

지붕은 상복을 입었다

상주처럼 쓸쓸하게 서 있던 감나무의 가지가

툭 꺾이고, 최후로 그가 벗어둔 장화 속으로

침묵이 고여들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그의 발자국이 하나 둘 새로

돋아났다

 

 


 

 

이동호 시인 / 비와 목탁

 

 

무작정 때리다보면

지구라는 이 목탁도 언젠가는 텅텅 소리가 날 테지

빗방울이 땅에 떨어져 '철썩' 마지막으로

목탁 한번 치겠다는 것이

전혀 어불성설은 아니지

빗방울이 연습삼아 사람들 목 위의

목탁을 먼저 쳐보는 것은

지구를 쳐볼 기회가 단 한번 뿐이라서지

비 오는 장날을 걸어다니다가

머리 위, 비닐에 묵직하게 고인 빗물을

고스란히 맞아본 적 있지

나도 모르게 내 몸 속에서

'앗'하는 목탁소리가 터져 나오더군

빗방울이 때리면 뭐든지 목탁이 되고 마는 것

그게 삶, 아니겠어

소리를 내기 위해 물렁해지는

저 땅을 좀 봐

새싹이 목젖처럼 올라오는 것. 보여?

멍 자국이라는 듯 쑥쑥 키를 키우는 저것

소리의 씨앗인 빗방울 속에서 자라는

저 푸른 목탁소리

 

 


 

이동호 시인

1966년 경북 김천 출생. 대구대 대학원 국어국문락과 졸업. 성균관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제6회 <시산맥상> 대상 수상. 2004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난시동인, 다시동인. 현재 신라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