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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믿음과 은총] 하느님의 종 송해붕 요한 세례자

by 파스칼바이런 2021. 9. 23.

[믿음과 은총] 하느님의 종 송해붕 요한 세례자

(1) 공깃돌 송해붕 요한 세례자

김상인 필립보 신부(미래사목연구소장)

 

 

연구소로 출근할 때 매번 가슴속에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종 송해붕(宋海鵬, 1926-1950) 요한 세례자입니다. 고촌 천등고개에 위치한 미래사목연구소는 송해붕 요한 세례자가 총살형을 당한 곳과는 불과 100m도 안 되는 곳에 있습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송해붕 요한 세례자는 1926년 당시 행정구역인 부천군 계양면에서 아버지 송희진(요셉)과 어머니 송예분(마리아)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모태 신앙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1944년 인천 공립 직업학교(현 인천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4월 덕원신학교로 편입합니다. 그는 신학교에서 동료 신학생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며, 동료들을 위해 단식을 하고 성인전을 꾸준히 읽었습니다.

 

1945년 조국의 해방과 함께 기쁨을 맞이했지만, 신학교 폐교로 송해붕은 일 년 남짓의 신학교 생활을 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국민 계몽 교육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는 1946년 계양면 귤현리를 시작으로 교육 사업을 실시하게 됩니다. 교육은 주로 저녁 7시~11시에 진행되었는데, 이 교육과 함께 학생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고 성경 이야기도 들려주며, 하느님의 존재를 알려주었고 참다운 복음적 삶을 살아가게끔 교육했습니다.

 

송해붕은 학생들에게 자신을 ‘공깃돌’로 소개합니다. “내 별명은 공깃돌이야. 공깃돌이 무슨 뜻인고 하니 누구든 아쉬운 때 갖고 놀고 싶은 만큼 갖고 놀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라는 의미지, 여러분은 이제부터 공깃돌 놀이하듯 나와 함께 신나게 공부해 보자.” 그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버려진 공깃돌이 될 때 하느님께서 값진 ‘진주’로 여겨주시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교육 방법은 언제나 재밌고 명쾌하며,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아직도 그의 수많은 제자는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송해붕은 이어서 고촌면 신곡리 은행정과 누산리 공소(현 김포시 양촌면 누산리)를 쉴 새 없이 오가면서 공부를 가르치고 전교 활동도 왕성하게 펼칩니다. 이 활동은 도저히 보통 사람으로서는 소화해내기 어려울 정도의 일정이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늘어나는 학생으로 인해 고촌에 강당을 지으면서 계몽 교육과 복음 전파의 열은 더욱더 뜨거워졌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송해붕의 복음 전파의 뜨거운 열정이 절정에 다다를 때, 6·25전쟁 이후의 상황은 그를 순교의 길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2021년 9월 12일 연중 제24주일 인천주보 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