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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신 앙 관 련

[미카엘의 순례일기] (38) 독일 한인성당 신자들의 한국 순례(중)

by 파스칼바이런 2021. 10. 15.

[미카엘의 순례일기] (38) 독일 한인성당 신자들의 한국 순례(중)

파독 한인들 가슴에 새겨진 상처와 슬픔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

가톨릭평화신문 2021.10.10 발행 [1632호]

 

 

 

▲ 독일 루르 한인본당 주임 신부와 신자들이 제주 이시돌목장에 있는 전 제주교구장 김창렬 주교의 숙소를 찾아 덕담을 듣고 강복을 청하고 있다.

 

 

그 당시 독일로 일하러 떠났던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대는 것이었습니다. 광부들은 독일인에게도, 그리고 탄광 안에서 생사를 같이했던 동유럽의 동료들에게도 차별당해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힘든 일을 도맡았습니다. 간호사들 또한 병원 내에서도 가장 힘들고 고된 부서에서 근무했습니다. 한국보다 조금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로 떠나 온갖 고생을 한 청년들은 오직 고향에 있는 가족만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버텼습니다.

 

처음에는 몇 년만 고생하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동생들의 공부가 끝나자 나이 드신 부모님께 집 한 채 정도는 장만해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번에는 학업을 마친 동생들이 결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애초에 3년으로 계획했던 타향살이가 40년이 훌쩍 흘러버렸던 것입니다.

 

주기적으로 한국을 방문한 분들도 있지만, 그날 인천공항에 도착한 순례단 대부분은 수 년, 심지어 십수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가족을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가족들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웃으며 한참이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합니다. 정성껏 준비한 선물꾸러미와 순례 후에나 풀어볼 수 있을 짐들이 정신없이 오고 갔습니다.

 

서울에서 시작하여 충청도와 경상도를 순례하고 제주까지 이어지는 열흘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는 새남터와 절두산, 당고개를 순례했고, 서울대교구에서 특별히 허락해 주신 덕에 주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서울을 떠난 후에는 미리내를 거쳐 유서 깊은 내포 지역의 여러 순례지도 방문했습니다.

 

갈매못을 순례하던 날이었습니다. 순례단 중 한 분의 동생께서 40명이 넘는 순례단을 위해 해변의 식당을 통째로 빌려 가장 좋은 해산물과 회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형님의 수고로 자신이 공부할 수 있었음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꾸준히 저축한 돈으로 안면도 한쪽에 넓은 땅을 구입한 후 집을 짓고 작은 카페도 하나 마련해 독일에서 형님이 보내주신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은퇴하신 형님은 현재 1년의 절반은 독일에서, 나머지 시간은 그곳에 머무십니다. 참 아름다운 형제애를 느낄 수 있었던 시간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 아름다움에 마냥 기뻐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며칠 후에나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순례단을 이끄시는 신부님께서 일정이 끝난 후 시간을 마련해 특강을 해주셨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의 순교 선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해주시던 신부님께서 갑자기 말씀하셨습니다.

 

“며칠 전 점심시간에, 여러분이 마냥 기뻐할 수 없었던 것을 압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의 아픔을 하느님께서는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러니 울고 싶으실 때는 언제든 그분 품에서 우셔도 됩니다.”

 

그러자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아파하는 모습에 저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울음이 조금 진정이 된 후 저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탄광이나 병원에서 평생 일을 계속하셨든, 다른 일을 찾아 그곳에 정착하셨든, 그분들은 모두 며칠 전 순례단을 대접해주셨던 가족처럼 노후를 한국에서 보내는 꿈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나이 드신 부모님은 그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임종의 순간조차 함께하지 못한 분들도 많았습니다. 또한, 오로지 가족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버텼으나 정작 그 가족에게서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좋은 나라에서 잘 먹고 잘살았던 거잖아? 우리가 얼마나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았는지도 모르면서.” 가벼운 말다툼은 금세 날 선 비난이 되었습니다. 반가운 손님도 사흘을 못 간다 했었던가요. 열린 문틈으로 “언제 가신대?” 하는 속삭임이 들려올 때면, 너무 긴 세월이 지나 돌아온 고향이 더는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만이 아프게 와 닿았습니다.

 

이렇듯 40년이 흘렀지만,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분들께 있어 한인 성당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신앙 모임에 불과했습니다. 여러 곳에 부탁해서 겨우겨우 신부님을 모시고, 현지 성당이 비어 있는 시간을 간신히 빌려 비로소 한인 성당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밤새 철필로 글을 쓰고 잉크 인쇄기를 밀어 주보를 찍었습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의 슬픔과 어려움을 모두가 알았습니다. 길 잃은 자들의 안식처가 되는 곳, 목자들의 울타리가 교회라면 그곳이야말로 진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