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자 시인 / 비대칭으로 말하기
울음에 슬픔이 어두워지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며칠씩 목이 마르고
괜찮다고, 이제 다 지나갔다고, 손을 맞잡은 생이 벽처럼 깊어가네
오늘 당신은 정적, 투명한 유리잔처럼 출렁이네
슬픔의 바깥쪽을 돌다가 한 뼘씩 순도 높은 궤도의 안쪽을 향해 안착하는 울어야 할 때 웃어버리는 당신
왼팔과 오른팔의 길이는 얼마쯤 다른가?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깨진 대칭은 누구의 계절인가?
한쪽 발로 무거운 추를 오래 끌고 다닌 듯 그늘이 다리를 저네 웃어야 할 때 울어버리는 당신
눈을 중심으로 낙타가 사막을 가로질러 가네
모래바람에 커다란 두 눈을 끔뻑거리며 슬픔을 끝도 없이 행진하네
그것마저 울어버리면 웃을 테지 쓸쓸히 울어버릴 테지
울음 밖을 머물던 통렬한 시詩도 눈 쌓인 골목을 떠돌던 미완의 노래도
김은자 시인 / 배꼽
그녀에겐 우물이 하나 있다 속살보다 부드러워 찢어지기 쉬운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었던 배꼽
남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지만 그, 배꼽이 그녀에게는 동굴이고 뿔이었다
오남매를 낳고도 늦도록 오이 행상을 한 여자, 그녀가 열 다섯살이 되던해 오십을 오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는 그녀의 어머니, 결혼후 오일 후 집을 나간뒤 오년만에 한번씩 들러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는 남편, 오백만원을 빌려쓴뒤 연락조차 두절해 버린 남동생, 그녀의 배꼽은 성난 뿔처럼 질주했고 가끔은 발을 헛딛어 뒷 발질에 가슴 속 동굴을 만들곤 했다
첫아기를 낳던날 배꼽이 말을 했다 아이의 얼굴조차 모르는 남편을 어떻게 묻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꺼내보면 흉터 투성이인 배꼽이었지만 그곳은 그녀가 뼈를 묻을 무덤이었다
막내 아들을 장가 보내던 날, 그녀의 남편은 육십이 넘은 나이에 돌아와 처음으로 집에서 목욕을 했다. 우물이 울컥울컥 오물을 토해냈지만 아들의 배꼽도 무덤이 되어 있었다
동굴이 되어버린 아들의 배꼽을 본 후 그녀는 이제 그만 우는 법을 지워 버리기로 했다
계간 서시 201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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