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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승도 시인 / 침묵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5. 18.

유승도 시인 / 침묵

 

 

 골바람 속에 내가 있었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려하지 않았으므로 어디로 가는지를 묻지도 않았다

 

 골짜기 외딴집 툇마루에 앉아 한 아낙이 부쳐주는 파전과 호박전을 씹으며 산등성이 너머에서 십년 묵언에 들어가 있다는 한 사람을 생각했으나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바람 속에 내가 있었으므로 바람의 처음과 끝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유승도 시인 / 사라진 것들

 

 

상황버섯이 암치료에 효과가 있다하여

채취하러 다니다보니,

신이 나서 따던 다른 버섯들을 보아도 반갑지가 않다

 

산삼 몇 뿌리만 캐면 팔자를 고친다 하기에

산에 갈 때마다 산삼을 찾다보니,

산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다

 

돌멩이도 그 중 빼어난 것이 있다 하여

좋은 수석을 바라며 강변을 걷다보니,

나름대로 멋있던 돌들이 하나같이 병신이다

 

달빛 같은 사람이 보고 싶어 인간의 거리로 나서니,

사람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다

 

유년시절 보았던 양귀비를 그리워하니,

눈앞에 피어나던 꽃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유승도 시인 / 똥을 푸면서

 

 

변소의 똥을 푼다 20년 넘게 하다보니 똥냄새도 맡을 만하다 입맛을 다시며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개의 경지는 되지 못하지만 뭐 구수 하게는 느껴지니 똥 푸기도 운동 삼아 할 만한 일이다

똥통은 돼지를 잡을 때 보았던 위장 속과 같다

일 년 내내 풀어지지 않은 단단한 덩어리를 바가지에 담으려 하는데 아들이 인터넷을 통해 중국에서 산 고무줄 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되팔기 위해 장터에 올렸다가 그런 건 올리면 안 된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고 똥통에 집어넣었다는 총이다 쇠구슬로 쏘면 사람도 잡을 위력을 지녔다

똥통에 내가 생각했던 똥만 있는 것은 아니란 걸 환갑을 넘긴 올해 들어서야 알았다

 

<내일을 여는 작가> 제79호, 2021년 하반기, 한국작가회의, 127쪽)

 

 


 

유승도 시인

1960년 충남 서천에서 출생. 경기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5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에 〈나의 새〉외 아홉 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창작과비평, 1999)와 『차가운 웃음』(랜덤하우스, 2007)가 있음. 현재 강원도 영월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