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희 시인 / 물새 발자국
물새의 걸음이 고요하다
모래밭을 거닐던 한줌의 무게가 찍혀 있다
문득, 걸음을 멈춘다 발자국을 벗어놓은 새들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끊어진 길을 향해 새들의 발목을 적시던 파도가 달려든다
발가락에 묻어 사라진 모래알로 모래밭이 조금씩 줄고 있다
수평선 너머 한 무리의 새들이 멀어진다
저 허공에는 소금기 묻은 수많은 발자국이 찍혀 있다
발자국이 끊어진 곳에서 새들은 날개가 돋는다
『모던포엠』 2020. 9월호
신재희 시인 / 어둠의 문서
수억 년 전 어느 숲은 쓰러져 화석이 되었다
까맣게 탄 증언을 쏟아내던 식물의 입자가 동굴을 베고 누웠다 시간을 거슬러 최초로 마주친 건 곡괭이의 거친 호흡이었을까
뼈대를 깎아 만든 수천 미터 지하에서 채굴한 화석은 한순간 시대에 밀려 빛을 잃고, 기울어진 옆구리처럼 조각조각 부서진 암석 덩어리는 조형물과 함께 묻혔다
허물어진 무덤처럼 애착이 가는 태백, 흔들거리는 관절은 소통을 접고 폐광에는 갈 곳 잃은 바람만 들락거린다
남아있는 흔적만 부둥켜안고 긴 잠을 자는 적요, 언제쯤 저 어둠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수백 년 골진 생을 퍼내다 땅속에 갇혀버린 어둠의 문서
똑, 똑, 목을 축여주던 암반수가 물소리로 어둠을 진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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