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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한봉 시인 / 공명을 듣다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23.

배한봉 시인 / 공명을 듣다

 

 

햇살이 산길을 넘어오는 아침

탈골하는 억새들, 음성이 청량하다

살과 피 다 버리고 뼈 속까지

텅 비운 한 생애의 여백

여백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연 담고 있는 것이냐

면도날 같은 잎으로 여름

베어 눕히며 언덕 점령하던 때 지나

흰 꽃 속에 허파에 든 바람 실어

허허허허거리던 시절,

간과 쓸개 빼놓던 굽이를 돌아

비로소 세상에 풀어놓은 넉넉한 정신

바람 찬 산을 넘어온 아침이

내 얼굴을 만진다, 이제 겨우 마흔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돌아오고 또 돌아와서 숨가쁜 나이

산에 올라 억새들 뼈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고 맑은 공명을 듣는다

내 심중에서도 조금씩 여백이 보이고

누가 마음놓고 들어와 앉아 불어도 좋을

젓대 하나, 가슴뼈 어딘가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배한봉, 『악기점』, 세계사, 2004년

 

 


 

 

배한봉 시인 / 아름다운 수작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를 본다

 

- 시집 「우포늪 확새』 (한국문학도서관, 2002.)

 

 


 

배한봉 시인

1962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1998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육탁』 『주남지의 새들』 『우포늪 왁새』 『흑조(黑鳥)』 등이 있음. 2011년 제26회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계간 『시인시각』 주간 역임. 웹진 <詩鄕>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