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봉 시인 / 공명을 듣다
햇살이 산길을 넘어오는 아침 탈골하는 억새들, 음성이 청량하다 살과 피 다 버리고 뼈 속까지 텅 비운 한 생애의 여백 여백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연 담고 있는 것이냐 면도날 같은 잎으로 여름 베어 눕히며 언덕 점령하던 때 지나 흰 꽃 속에 허파에 든 바람 실어 허허허허거리던 시절, 간과 쓸개 빼놓던 굽이를 돌아 비로소 세상에 풀어놓은 넉넉한 정신 바람 찬 산을 넘어온 아침이 내 얼굴을 만진다, 이제 겨우 마흔 몇 넘어야할 고개, 보내야할 계절이 돌아오고 또 돌아와서 숨가쁜 나이 산에 올라 억새들 뼈 속에서 울려나오는 깊고 맑은 공명을 듣는다 내 심중에서도 조금씩 여백이 보이고 누가 마음놓고 들어와 앉아 불어도 좋을 젓대 하나, 가슴뼈 어딘가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배한봉, 『악기점』, 세계사, 2004년
배한봉 시인 / 아름다운 수작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를 본다
- 시집 「우포늪 확새』 (한국문학도서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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