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순 시인 / 당신 눈에 내가 안 보이는 이유
시간은 참 좋겠습니다 이유 없는 것들에 이유들을 만들고 이유 있는 것들에 이유들을 버리고 이유들이 쌓여서 공고한 어제가 되고 무너지는 오늘과 내일 사이에 목소리를 감추고
슬픔의 질문 없음 대답의 입술 없음
말들과 기억들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버리며
행과 불행도 모두 한 우주라고 믿으며 광폭한 건기 속에서 숨도 차지 않아 시간은 참 좋겠습니다
시간은 표정도 다양해서 누가 롤러코스터 운명선을 지나면 저렴한 환희와 비명을 아끼지 않고
누가 강물 속에 그림자를 버리면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의 눈물을 필사하다가
저주와 조롱의 문장 카드를 받거나 죄와 실수의 내역을 추궁당하면 무표정 무언이라는 면책특권이 있어서 시간은 정말 좋겠습니다
카드비, 부고장 같은 단어들을 삼키고 고통에 낙서를 갈긴 후 면벽이나 해서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시간이 자폐증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랑 친구하자고 손을 먼저 내밀어도 될까요
얼굴색이 너무 창백해서 나는 유령과 친구가 됩니다 당신 눈에 내가 자꾸 안 보이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방 안에서 모래놀이 중입니다 손가락 사이로 시간이 빠져나갔다가 돌아왔다가 반복됩니다 한밤에 우는 모래가 됩니다
그 위로 어쩌다 별안간 고개 내미는 꽃의 영령이 됩니다
눈물의 진화 쪼끔 있음 바람의 내력 쪼끔 있음
-무크작가연대, 2022년 14권 1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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