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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전형 시인 / 서귀포 천리향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24.

양전형 시인 / 서귀포 천리향

 

 

대문 없는 순아네 마당에 천리향이 산다

봄마다

혼자 피어 집을 지키기도 하고

고운 향기를 칠십 리 가득 뿌리기도 한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는데

순아 아버지가 그만 목을 맸다

빚이 춥고 농사가 춥다더니

봄은 왔는데,

사방 온통 섬꽃들

봄이 왔다고 야단법석인데

너무 춥다며 땅 속으로 숨어들었다

 

천리향은 다시 피었다

업둥이 눈칫밥처럼 살금살금 피어나던 날

뜰에 대문처럼 서서 순아는 울었다

봉곳하던 가슴도 함께 피어

서러운 향기만

서귀포 천리 밖까지 나섰다

 

 


 

 

양전형 시인 / 첫꽃 핀 동백

 

 

 돈네코 허리춤에 네 살바기 제주동백. 언어 이전 몸짓으로 억겁 섭리 터득더니, 저 봐라 생살 뚫은 송이들 그리움이 분명하다. 동지 섣달 긴긴밤 눈발이 하 서럽고 소대한 모진 바람 자진모리로 되치기하다 겹치마 걷어 올리며 난생 처음 벙글었네.

 

 아스랗던 새천년이 어쩜 이리 성큼 왔나. 고운 입에 여의주 물고 비상하는 서귀포여, 아무튼 저 꽃 보게나 드디어 속 보였네.

 

 저 한 몸 불질러 이 땅을 밝히려나 등성이를 내려온 허옇게 시린 산울음도 길섶에 붉어 따스한 치마폭으로 스미는군. 핏빛보다 진솔한 거 있으면 나오라며 정방포구 물어뜯다 돌아누운 스무세기, 어쩌면 저 꽃 피우려 천년 밤 지새운지 몰라.

 

 


 

양전형 시인

1953년 제주시 출생. 1994년 ‘한라산문학’ 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1996년 시집 <사랑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 시집 <바람아 사랑밭 가자> <하늘레기> <길에 사는 민들레> <나는 둘이다> <도두봉 달꽃> <허천바레당 푸더진다> <동사형 그리움>. 제5회 제주문학상, 제3회 열린 문학상, 제2회 한국자유시인상. 현재 한라산문학동인 회원, 한국문인협회제주특별자치도지회 회원, 현대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