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전형 시인 / 서귀포 천리향
대문 없는 순아네 마당에 천리향이 산다 봄마다 혼자 피어 집을 지키기도 하고 고운 향기를 칠십 리 가득 뿌리기도 한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봄이 왔는데 순아 아버지가 그만 목을 맸다 빚이 춥고 농사가 춥다더니 봄은 왔는데, 사방 온통 섬꽃들 봄이 왔다고 야단법석인데 너무 춥다며 땅 속으로 숨어들었다
천리향은 다시 피었다 업둥이 눈칫밥처럼 살금살금 피어나던 날 뜰에 대문처럼 서서 순아는 울었다 봉곳하던 가슴도 함께 피어 서러운 향기만 서귀포 천리 밖까지 나섰다
양전형 시인 / 첫꽃 핀 동백
돈네코 허리춤에 네 살바기 제주동백. 언어 이전 몸짓으로 억겁 섭리 터득더니, 저 봐라 생살 뚫은 송이들 그리움이 분명하다. 동지 섣달 긴긴밤 눈발이 하 서럽고 소대한 모진 바람 자진모리로 되치기하다 겹치마 걷어 올리며 난생 처음 벙글었네.
아스랗던 새천년이 어쩜 이리 성큼 왔나. 고운 입에 여의주 물고 비상하는 서귀포여, 아무튼 저 꽃 보게나 드디어 속 보였네.
저 한 몸 불질러 이 땅을 밝히려나 등성이를 내려온 허옇게 시린 산울음도 길섶에 붉어 따스한 치마폭으로 스미는군. 핏빛보다 진솔한 거 있으면 나오라며 정방포구 물어뜯다 돌아누운 스무세기, 어쩌면 저 꽃 피우려 천년 밤 지새운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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