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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상하 시인 / 물끄러미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2. 10. 25.

정상하 시인 / 물끄러미

 

 

나는 나로부터 먼 데 서 있었다

내가 비에 젖어도 나는 젖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았다

눈 속에 떨고 있는 내가 있고

눈발의 건너편에 서 있는 내가 있었다

 

지나가시는 하느님의 등이 허전했다

새 잎이 혼자 돋아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밤새 고양이가 울고

밤새 고양이가 남았다

 

나를 태운 기차가 떠나고 나는 남았다

 

마루는 마루끼리 멀고

벽은 벽끼리 멀었다

 

우리는 각각 제 발등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각 옷에 묻은 풀벌레 울음이나 뜯고 있었다

혼자 견디다가 혼자 죽는 것을 아득히 보고 있었다

누구도 누구를 흔들어 일으킬 말이 없었다

 

-시집 『사과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2020. 지혜

 

 


 

 

정상하 시인 / 초면

 

 

어린 소가 목책 너머로 내다본다

머리를 갸웃한다

낯설다

 

어린 소가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와

목책에 얼굴을 얹는다

낯설다

 

다른 소가 어린 소 옆에 와서 선다

또 다른 소가 그 옆에 와서 서고

밤색 소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다가온다

조금 큰 소가 한 마리 더 오고

배꼽이 떨어지지 않은 새끼소가 와서

큰 소 다리에 붙어선다

이제 막 뿔이 돋는 송아지가

겅중겅중 와서 목책 틈새로 내다보고

눈이 더 커지는 소들이 일렬로 늘어선다

낯설다

 

소들이 건너다보는 이쪽의

나도 저러고 있나 보다

크고 작은 내가 소들을 건너다보나 보다

밝고 흐린 내가 그러고 있나 보다

 

꼬리를 흔들어 파리를 쫓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그들이 멀뚱멀뚱 보고 섰다

낯설다

 

 


 

정상하 시인

경남 사천 출생. 1999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비가 오면 입구가 생긴다> <사과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