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하 시인 / 물끄러미
나는 나로부터 먼 데 서 있었다 내가 비에 젖어도 나는 젖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았다 눈 속에 떨고 있는 내가 있고 눈발의 건너편에 서 있는 내가 있었다
지나가시는 하느님의 등이 허전했다 새 잎이 혼자 돋아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밤새 고양이가 울고 밤새 고양이가 남았다
나를 태운 기차가 떠나고 나는 남았다
마루는 마루끼리 멀고 벽은 벽끼리 멀었다
우리는 각각 제 발등이나 내려다보고 있었다 각각 옷에 묻은 풀벌레 울음이나 뜯고 있었다 혼자 견디다가 혼자 죽는 것을 아득히 보고 있었다 누구도 누구를 흔들어 일으킬 말이 없었다
-시집 『사과를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2020. 지혜
정상하 시인 / 초면
어린 소가 목책 너머로 내다본다 머리를 갸웃한다 낯설다
어린 소가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와 목책에 얼굴을 얹는다 낯설다
다른 소가 어린 소 옆에 와서 선다 또 다른 소가 그 옆에 와서 서고 밤색 소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다가온다 조금 큰 소가 한 마리 더 오고 배꼽이 떨어지지 않은 새끼소가 와서 큰 소 다리에 붙어선다 이제 막 뿔이 돋는 송아지가 겅중겅중 와서 목책 틈새로 내다보고 눈이 더 커지는 소들이 일렬로 늘어선다 낯설다
소들이 건너다보는 이쪽의 나도 저러고 있나 보다 크고 작은 내가 소들을 건너다보나 보다 밝고 흐린 내가 그러고 있나 보다
꼬리를 흔들어 파리를 쫓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그들이 멀뚱멀뚱 보고 섰다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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