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백선 시인 / 마티에르
지금 추운가요? 바람에게 묻는 안부처럼 당신의 직립은 간단치 않죠 점. 점. 점, 모래 시간이 쌓인 후 내 발밑에 늘어나는 점묘들
발자국은 집으로 가는 길을 빼곡히 덧칠하고 아스팔트 위에 밤이 꼬박꼬박 굳어갔어요
우리는 안과 밖에서 서로 열려는 유리문의 찰나를 기억해요 희미하게 비치는 표정에 감정을 흘리고 때로는 멋대로 고정시키면서
항간의 추문을 견디느라 셔츠가 구겨졌죠 새 단추를 달아주던 순한 손짓으로 회갈색 우울이 침울하게 드러난 나목, 거기 걸린 풍선의 부푼 심장을 어루만져줘요 꽃 피우고 싶어요
다 지난 일이에요 기름기 빠진 당신과 나 사이 봄은 햇빛에도 번들거리지 않아요 꽁꽁 언 벽, 푹푹 빠지는 바람 지우고 손끝에 닿는 질감 하나
당신이 목련이에요.
-시집 <그라데이션>에서
성백선 시인 / 칼 맛을 아니
햇살은 아침으로부터 오고 붓살은 저녁으로부터 온다 창가 소철나무가 흔들리는 걸 보니 오늘은 양각이다 물컹한 그도 돌 앞에서 만큼은 단단한 돌의 방식을 따랐다 가느다란 필마모에서 나오는 붓질은 말의 참처럼 꼿꼿하다 묵향이 주묵과 흑묵사이를 전서체로 흐르면 한 획에서 다섯가지 묵색이 나왔다. 첫 발 내딛을 때와 스며들 때 나아갈 때와 머무를 때 그리고 갈무리 할 때의 묵색, 삿된 기교가 들어설 틈은 없다 내겐 멀고도 먼 득의다 한 자 한 자 포치한 뜻을 예리한 전각도로 파고들어 가 하얀 피를 낼 때 감도는 칼의 맛, 그의 굽은 등 뒤의 시간에 가루 같은 적막이 쌓인다 그 고요 속에 상복 입은 돌덩이 하나 오래도록 앉혀 놓고 아버지는 족자 안에서 붉게 웃으신다 무모한 골목 끝에서 한때의 방황을 마치고 나는 나에게로 정착한다 떠나간 사람과 돌아온 사람이 만나 깊어가는 가을, 카랑카랑한 아버지의 칼맛이 그립고 그리운 -
-성백선 시집, 『그라데이션, 시산맥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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